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도군 중심지로부터 서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청도에서 창녕으로 가는 20번 국도변 오른쪽으로 902번 지방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풍각초등학교 맞은편 도로변에 삼층석탑이 위치한다.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으로 상륜부를 제외하면 완벽한 형태이다.
석탑이 위치한 장소는 현재 논으로 경작되어 있고 탑 앞에 석등연화대석 1기를 제외하면 원래 사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전해오는 말로는 석탑이 위치한 곳이 원래 천정사(天井寺)라고 한다. 또한 사찰은 쌍탑 가람이었는데 동탑은 광복 직후 파괴되어 없어졌고 지금 남아 있는 탑이 서탑이라고 한다. 현재 탑 앞에 위치한 석등 대석도 풍각초등학교 뒤편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로 미루어 원래 사찰은 대규모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석탑에 대한 해체나 수리에 대한 내역은 남아 있지 않다.
석탑의 기단은 이중기단으로, 지대석은 지표에 매몰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하대저석(下臺底石)과 면석은 한 돌로 되어 있다. 면석은 ‘ㄱ’자형 귀틀석을 네 모서리에 두고 좌우측에 탱주가 새겨진 ‘ㅡ’자형 면석을 4면에 끼워 넣어 총 8매의 석재로 결구되었다. 하층갑석은 면석과 같은 ‘ㄱ’자형 부재를 모서리에 배치하고 ‘ㅡ’자형 부재를 끼워 넣어 총 8매로 되어 있으며, 모서리의 합각선이나 솟음기법은 보이지 않는다. 상층면석과 연결되는 부위의 중대받침은 각형과 호형의 2단 몰딩이 있다.
상층기단면석은 하층기단과 같이 ‘ㄱ’자형 귀틀석을 네 모서리에 두고 ‘ㅡ’자형을 4면에 끼워 넣어 총 8매의 석재로 결구되었다. 북면, 남면, 서면은 하층기단면석과 같이 좌우측에 탱주가 새겨진 면석이나 동면은 향좌측에만 탱주가 새겨진 면석이며 향좌측의 탱주는 ‘ㄱ’자형 귀틀석에 새겨져 있다. 상대갑석은 크기가 비슷한 4매로 구성되었으며 갑석하단에는 1단의 부연이, 상단에는 2단의 각형 탑신받침이 있다.
탑신은 3층으로 각 층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로 총 6매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석은 모두 네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하였고 표면의 장식이나 흘림기법은 없다. 옥개석은 5단의 옥개받침과 상단에는 2단의 각형 탑신받침이 있다. 처마의 저부는 수평 직선으로 물끊기 홈은 마련되지 않았으며 각 모서리마다 2개씩의 풍경공이 있다. 이 탑은 초층탑신이 비교적 높고 2층 탑신부터 절반 이상으로 급감하며, 각층 옥개석이 넓어 안정된 비례감각을 보인다. 노반을 포함한 상륜부는 모두 결실된 상태이며 찰주공은 확인할 수 없다.
탑은 이중기단에 삼층탑신을 가진 통일신라 전형 양식으로 상륜부 전체와 하층기단 갑석, 상층기단 갑석의 일부가 파손·결실 되었을 뿐 다른 부분은 비교적 완전한 편이다. 이 탑에서 가장 주목되는 모습은 역시 상하층 기단의 결구법이다. 즉 상하층 면석 모두 모서리에는 ‘ㄱ’자형 귀틀석과 ‘ㅡ’자형 면석을 각 면 4매씩 결구하여 각각 8매로 구성되어 있다.
석탑을 구성하는 부재의 숫자를 살펴보면, 기단부 28매, 탑신부 6매로 총 34매이다. 기단부를 구성하는 석재는 숫자뿐만 아니라 균일성 있는 결구법을 보이며 상·하층 기단부의 탱주 숫자가 각각 2주씩이며, 탑신 모두 5단의 옥개받침을 유지하는 등 8세기 신라 석탑의 전형적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8세기 중엽 이후 신라의 석탑문화는 울주, 청도, 대구, 성주 등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는데, 이 석탑의 양식을 통해 중앙 양식의 석조기술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또한 이 석탑은 전체적으로 상하층 2주씩의 탱주와 5단의 옥개 받침을 지니고 있으며 안정적인 비례를 보이는 수작으로 8세기를 대표하는 탑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