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서는 행서를 빨리 쓰기 위하여 필획을 생략하여 곡선 위주로 흘려 쓰는 한자 서체이다. 서체사에서는 그 변천 과정에 따라 장초가 선행하며 이후 금초·광초의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장초는 글자가 서로 이어지지 않고 금초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초서이다. 광초는 미친 듯 방종한 태도로 썼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초서는 우리나라에 한자의 전래와 함께 들어왔지만 초기 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유물은 없다. 조선 초·중기에 최흥효·이용·김구·이황·양사언·한호 등이 초서로 이름이 났다. 이들은 대략 왕희지풍의 전통적 초서를 바탕으로 한다.
초서의 발생에 대하여는 일반적으로 행서(行書)가 출현한 뒤 이를 쓰기에 편리하고 속사(速寫)할 수 있도록 짜임새와 필획을 간략하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록상으로 볼 때, 전서(篆書)를 사용하였던 중국 전국시대에 이미 초고(草藁)라 하여 속사를 위한 초체(草體)가 있어 정체(正體)와 구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넓은 뜻에서의 초서는 모종의 자체(字體)를 초략(草略)한 서체 모두를 가리킨다고 하겠다.
또한, 서체사(書體史)에서 말하는 고정된 의미의 초서도 예서(隷書)를 사용하였던 한초(漢初)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그 변천과정에 따라 장초(章草)가 선행하며 이후 금초(今草) · 광초(狂草)의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장초는 예서를 간략하게 속사한 것으로 서한(전한) 원제(元帝) 때, 사유(史游)가 창안하였다고 전하며, 후세인들이 그가 쓴 『급취장(急就章)』으로 인하여 이를 장초라 이름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두도(杜度)가 만든 것으로 동한(후한) 장제(章帝)가 이를 애호하여 장초라 하였다고도 전하나, 모두 신빙할 수 없다.
이 밖에 당(唐) 장회관(張懷瓘)은 한 장제와 위(魏) 문제(文帝)가 초서로 장주(章奏)하라 하였으므로 장초라 이름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후 송(宋) 황정견(黃庭堅) · 미불(米巿) 등의 명서가와 대부분의 소학가(小學家)들이 이 설을 따르고 있어 믿을 만한 설로 본다.
장초는 예초(隷草) · 급취(急就)라고도 하는데, 예서 필획의 특징인 파책(波磔)이 남아 있으며 글자가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근래에 출토된 한대의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은 초기의 장초로서 아직 일정한 규범은 정하여지지 않고 있으나, 동한의 장지(張芝)에 이르러 점차 정리되며 위진시대에 이르면 더욱 정비되어 장초의 규범이 이루어진다.
장초의 법첩(法帖:법서)으로는 사유의 『급취장』과 『순화각첩(淳化閣帖)』에 실린 장지 · 황상(皇象) · 삭정(索靖) 등의 장초가 대표적이며, 근래 돈황(敦煌) · 누란(樓蘭) · 거연(居延) 등지에서 발견된 한 · 위진의 목간은 장초의 실물사료로 매우 귀중하다.
금초는 오늘날 흔히 사용되는 초서로, 장지가 장초에서 파책을 제거하고 글자 상하의 혈맥(血脈)을 이어 창안하였다고 전한다.
이후 동진시대 왕희지(王羲之) · 헌지(獻之) 부자에 의하여 금초는 극치를 이루어 후대의 표준이 되었다. 금초의 법첩으로는 장지로부터 왕희지 · 헌지에 이르는 명서가들이 모두 초서에 뛰어나 『순화각첩』 등의 집첩(集帖)에 많이 실려 있으며, 독첩(獨帖)으로 왕희지의 『십칠첩(十七帖)』 등과, 쌍구본(雙鉤本)으로 왕희지의 『상란첩(喪亂帖)』, 왕헌지의 『지황탕첩(地黃湯帖)』 등이 다수 전한다.
그 뒤 진수대(陳隋代) 지영(智永)의 『천자문(千字文)』, 당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가 유명하다. 이 밖에 당의 장욱(張旭) · 안진경(顔眞卿)과 송의 황정견 · 미불, 원(元)의 조맹부(趙孟頫), 명(明)의 동기창(董其昌) · 미만종(米萬鍾) 등 역대의 명서가들 중에 금초에 뛰어난 인물이 많았다.
광초는 당 장욱에서 비롯된 것으로, 위진시대 이래 왕희지의 전통적인 초서필법에서 벗어나 술이나 자연계의 현상으로부터 정서(흥취)나 영감을 불러일으켜 광사(狂肆)하게, 즉 방종(放縱)한 태도로 썼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후 당 회소(懷素)가 개성적인 광초서풍을 이루었다. 광초의 대표적인 예로는 장욱의 『자언첩(自言帖)』과 회소의 『자서첩(自言帖)』이 있다.
한편, 금초에 관련된 용어로 독초(獨草)와 연면초(連綿草)가 있다. 전자는 글자마다 필획이 단독으로 떨어진 것을 말하며 후자는 여러 글자의 필획이 서로 이어진 것을 말한다.
또, 반초(半草)와 전초(全草)가 있는데, 전자는 행서와 초서 사이 정도로 흘려 쓴 것으로 특히 왕헌지가 이에 뛰어났다고 하며, 행서와 초서를 섞어 쓴 행초(行草)와 혼용되기도 한다. 후자는 상대적으로 모두 초서로 쓴 것을 이른다.
또한, 대초(大草)와 소초(小草)가 있는데, 전자는 자형이 크고 필획이 매우 간단한 것으로 광초에 가깝다고 하겠으며, 후자는 비교적 자형이 작고 필획이 단정하여 알아보기 쉬운 것을 말한다. 이 밖에 유사초(遊絲草)라 하여 필획이 실처럼 가늘고 실테처럼 이어지는 유희적 글씨도 있는데 송 오열(吳說)이 유명하다.
참고로 초서는 필사의 속도, 먹의 활삽(滑澀), 자형의 크기, 필획의 곡직(曲直), 점획의 태세(太細), 짜임의 소밀(疎密) 등의 변화가 오체(五體) 중 가장 심하고 다양하여 작가에 따라 개성이 잘 드러난다. 더욱이, 작품용으로 의식하지 않고 쓴 편지나 문고(文稿)류 등에서 오히려 진면목을 살필 수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한자의 전래와 함께 중국의 서법이 들어왔으나 초서 발달의 초기 과정을 보여 주는 유물은 없다. 이후의 초서 진적은 고려까지 수종에 불과하며, 더욱이 금석문에서는 초서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까닭에 전하는 예가 없어, 서예사 서술의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단지, 삼국 말기부터 고려까지에 걸쳐 행서로 된 금석문 중에서 왕희지풍이 주류를 이루고 그 품격도 높았음을 볼 때 초서도 왕풍(王風)을 근간으로 유행되었으리라 추측된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에 유행한 조맹부체 역시 왕희지체를 전형으로 삼은 것이므로 크게는 왕체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겠다.
이후 서적(書蹟)이 그나마 남아 있는 조선 초기 · 중기의 초서로 이름난 최흥효(崔興孝) · 이용(李瑢) · 김구(金絿) · 이황(李滉) · 황기로(黃耆老) · 양사언(楊士彦) · 한호(韓濩) 등도 대략 왕희지풍의 전통적 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최흥효와 이용은 조맹부체의 영향이 배어 있으며, 이황은 단아하고 기품 있는 독초를, 황기로는 회소풍을, 양사언은 활달하고 연면성이 강한 초서풍을 각각 이루었다.
후기를 대표하는 윤순(尹淳)은 청아한 미불풍을, 신위(申緯)는 단정한 동기창풍을 이루는 등 다양한 초서가 나타났지만, 저변을 이루는 초서풍은 역시 진대(晉代)의 전통적인 초서였다.
이후 18세기 후반에 중국으로부터 비학(碑學)의 전래로 전서 · 예서에 대한 관심이 쏠리면서 초서의 예술성이 상대적으로 위축된 감은 없지 않으나, 여전히 일상생활에서 초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근래에 들어와 한글 교육과 필사도구의 발달로 인하여 상대적으로 한자교육이 점점 퇴보되고 한문을 이해하는 계층이 엷어짐에 따라, 초서는 생활에서 멀어지고 어렵게 느껴졌으며, 단지 예술 분야에서 서예가들의 창작대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아울러 상당 부분이 초서로 작성된 고문서를 해독할 수 있는 인력 또한 격감되어 국학(國學)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에도 적지 않은 장애요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