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흥효는 조선 전기 예문관 직제학, 첨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서예가이다. 1370년경에 태어나 1452년 이후에 사망했다. 관직에서는 주로 국가의 대외 문서와 각종 필사 업무를 담당하였다. 최흥효는 고려 말·조선 초에 초서로 일가를 이룬 서예가이다. 15세기 후반 『소문쇄록』에서 안평대군의 행서와 함께 최흥효의 초서를 언급하고 있다. 최흥효의 초서는 정형화된 송설체에 비해 분방한 경향을 보인다. 그의 필적으로는 『근묵』에 초서로 쓴 「두목시 염석유 외」가 유일한 진적이다. 이 밖에 해서로 쓴 「최치운묘비」가 있다.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백원(百源), 호는 월곡(月谷)으로 초명은 효흥(孝興)이었으나 흥효(興孝)로 개명하였다. 고려 말∼조선 초기 초서로 일가를 이룬 서예가로, 관직에 있을 당시에는 국가의 대외 문서와 각종 필사 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최흥효의 조부는 좌윤(左尹)을 지낸 최흡(崔洽)이고, 부친은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낸 최일(崔壹)이다. 모친은 김해 송씨(金海 宋氏)이다. 판서를 지낸 성주 이씨 이숭문(李崇文)의 딸과 혼인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인녕부윤(仁寧府尹)을 지낸 여흥 민씨 민겸(閔謙)의 딸을 후처로 맞아들였다.
최흥효의 생몰년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문종실록』에 따르면, 최흥효가 예문관 직제학을 마지막으로 70세에 관직을 그만두었고, 1452년 80이 넘은 나이에 문종에게 가요(歌謠)를 바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의 벼슬을 받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최흥효는 1370년경에 태어나 1452년 이후에 작고한 것으로 추정된다.
최흥효는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한 이후 1414년 승문원 부교리로 있을 때 명(明)에 보내는 자문(咨文)을 잘못 작성하여 파직당하였다. 이후 관직에 복귀하여 인녕부판관(仁寧府判官)을 지냈으나 1420년(세종 2) 상주문(上奏文)에 날짜를 넣지 않은 것이 또 문제가 되어 익산에 귀양 갔다가 그 해 말에 복직되었다.
이후 사간원 우헌납, 병조 정랑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을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최흥효는 대외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는 한편, 필사와 관련된 국가의 업무도 병행하였다. 이조 낭청으로 있을 때에는 국왕의 관리 임명 문서인 고신(告身)을 필사하기도 하였으며, 왕실 발원 불사의 사경(寫經) 작업에도 여러 차례 참여하였다.
최흥효는 초서로 일가를 이뤄 조선 초에 안평대군 이용(李瑢)과 더불어 각각 초서와 행서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5세기 후반의 문인 조신(曺伸)이 『소문쇄록(謏聞瑣錄)』에서 여말선초의 명필을 논하면서 “최흥효의 초서와 안평대군의 행서가 세상에 성행하였지만 지금은 이미 희귀해졌다.”고 아쉬워하며 두 사람을 특별히 언급한 것을 보면, 15세기 전반 초서에 독보적이었던 최흥효가 행서에 뛰어났던 안평대군과 그 필명에서 동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성현(成俔)은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최흥효의 글씨체가 거칠고 촌스럽다는 평가와 함께 안평대군 이용이 최흥효에게 글씨를 청한 뒤 이를 찢어 벽에 발라 버렸다는 일화를 남겼다. 이는 정형화된 송설체(松雪體)에 비해 분방한 경향을 보였던 최흥효의 글씨를 비판한 것으로, 송설체가 이미 저변에 확대되었던 15세기 후반의 심미적 기준과 인식에 따른 평가라 할 수 있다.
최흥효의 필적으로는 『근묵(槿墨)』에 초서로 쓴 「두목시 염석유 외(杜牧詩 念昔遊 外)」가 유일한 진적으로 남아 있다. 편측으로 기울어지는 짜임과 분방한 운필은 조맹부와 동시기에 활동하였던 강리노노(康里巎巎)의 초서풍과 유사하여 당시에 송설체를 비롯하여 원대의 서풍이 다양하게 수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유사한 서풍이 동시기의 윤계동(尹季童)에게도 보이며 후대의 이태(李迨), 유몽인(柳夢寅) 등으로 이어졌다.
이 밖에 해서로 쓴 「최치운묘비(崔致雲墓碑)」(1442년)가 강릉시 대전동에 있으며, 『해동명적(海東名蹟)』 · 『동국명필(東國名筆)』 · 『대동서법(大東書法)』 등의 법첩에도 초서 필적이 모각되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