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명적 ()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 중 해동명적 - 신덕린 필적
여주이씨 옥산문중 유묵 중 해동명적 - 신덕린 필적
서예
유물
16세기 전반(1515년경) 신공제(申公濟)가 간행한 법첩.
이칭
이칭
海東名蹟
정의
16세기 전반(1515년경) 신공제(申公濟)가 간행한 법첩.
개설

『해동명적』은 신공제(1469∼1536)가 신라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우리나라 명필들의 글씨를 모아 1515년경 목판에 새겨 간행한 법첩(法帖: 명필의 글씨를 돌이나 나무에 새겨 만든 서첩)이다. 1530년에는 목판본을 돌에 새겨 석판본으로도 간행되었다. 목판본과 석판본의 간행 시기와 선후 관계는 석판본 후집 말미에 새겨져 있는 경상도 관찰사 최세절(崔世節, 1479∼1535)의 발문에 의해 확인된다. 발문의 내용에 따르면, 김노(金魯)가 경상도 관찰사 최세절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부친 김희수(金希壽)와 박팽년(朴彭年)의 필적을 첨가하여 석판본으로 간행해 줄 것을 청하였고, 최세절이 안동부사 유희저(柳希渚)에게 부탁해 석공을 모아 돌에 새기게 하고 도사(都事) 안현(安玹)을 시켜 상세한 교정을 보게 한 뒤 1530년 7월에 개간 사업을 종료하였다. 따라서 석판본은 앞서 간행된 목판본을 모본으로 삼아 1530년에 개간된 후각본임을 알 수 있다. 목판본 간행 시기에 대해서도 신공제가 창원부사(昌原府使)로 있을 당시로 지목하고 있어 1515년경에 『해동명적』 목판본이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해동명적』은 목판본과 석판본 모두 원래 전집과 후집으로 편집되어 있다. 석판본 전집에는 문종(文宗)부터 무명씨(無名氏)까지 17인의 필적이 실려 있고, 후집에는 최흥효(崔興孝)부터 김희수까지 25인의 필적이 실려 있고 맨 끝에 최세절의 발문이 새겨져 있다. 석판본이 목판본과 다른 점은 후집에 박팽년과 김희수의 필적이 추가로 첨각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박팽년과 김희수 필적의 수록 여부는 『해동명적』의 목판본과 석판본을 구분하는 주요 기준이 된다. 2인이 추가로 수록된 석판본을 기준으로 볼 때 『해동명적』 전집·후집에 수록된 서예가는 모두 42인이고 106점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 인명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집에는 문종의 「조맹부시 절구(趙孟頫詩 絶句)」 등 2건을 비롯하여 성종(成宗)의 어제(御製) 「송황감시(送黃柑詩)」 등 4건, 최치원(崔致遠)의 「추야우중(秋夜雨中)」 등 2건, 김생(金生)의 「이백시 왕우군(李白詩 王右軍)」 등 5건, 승 영업(僧 靈業)의 「한고조 대풍가(漢高祖 大風歌)」 등 2건, 승 탄연(僧 坦然)의 「법어(法語)」, 이제현(李齊賢)의 「소상팔경시(瀟湘八景詩)」, 이암(李嵒)의 「봉하등제시(奉賀登第詩)」 등 7건, 신덕린(申德鄰)의 「왕발시 등왕각(王勃詩 滕王閣)」, 이강(李岡)의 자작시 2건, 승 혜근(僧 慧勤)의 「시제(詩題)」, 성석린(成石璘)의 「배적시 최구욕왕남산마상구호여별(裴迪詩 崔九欲往南山馬上口號與別)」 등 2건, 박초(朴礎)의 자작시 2건, 권근(權近)의 「당 허혼시 추사(唐 許渾詩 秋思)」 등 13건, 하연(河演)의 자작시 2건, 신장(申檣)의 칠언절구 2건, 무명씨의 「우의정 유관(柳觀)의 사직전(辭職箋)에 대한 비답」이 실려 있다.

후집에는 최흥효의 「구경당시첩(具慶堂詩帖)」 등 3건을 비롯하여 안지(安止)의 자작시, 박희중(朴熙中)의 칠언절구 2건, 고득종(高得宗)의 자작시, 박연(朴堧)의 자작시, 성삼문(成三問)의 「송죽설월송(松竹雪月頌)」 등 3건, 박팽년(朴彭年)의 「왕안석시 고송(王安石詩 古松)」, 비해당(匪懈堂) 이용(李瑢)의 「증도가(證道謌) 간행 서문」 등 12건, 성임(成任)의 오언율시 2건, 서거정(徐居正)의 「중추일 기자고(中秋日 寄子固)」 등 3건, 김뉴(金紐)의 칠언율시 등 4건, 홍응(洪應)의 「팔경시발(八景詩跋)」, 정난종(鄭蘭宗)의 「차감사운 별조부정선생부소환경(次監司韻別曺副正先生赴召還京)」, 이숙함(李淑瑊)의 자작시, 김종직(金宗直)의 「송양윤보지경(送梁潤甫之京)」 등 3건, 김흔(金訢)의 「송양사천가행지임(送楊泗川可行之任)」, 권건(權徤)의 「전별시(餞別詩)」 2건, 신종호(申從濩)의 자작시, 홍귀달(洪貴達)의 자작시 2건, 박효원(朴孝元)의 자작시, 조위(曺偉)의 자작시, 한훈(韓訓)의 「당 이구시 백의수도중음(唐 李玖詩 白衣叟途中吟)」, 임희재(任熙載)의 「이주(李胄)의 과시(課試) 동릉종과(東陵種瓜)」, 박경(朴耕)의 「소옹시 낙화음(邵雍詩 落花吟)」 등 2건, 김희수(金希壽)의 「왕안석시 송손자고(王安石詩 送孫子高)」 등 5건이 실려 있다.

『해동명적』에 실린 필적은 시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자작 시문인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개인 문집에 수록되어 있어 초고 필적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서풍은 여말선초 이래로 큰 영향을 미쳤던 원(元) 조맹부(趙孟頫)의 이른바 송설체(松雪體)뿐만 아니라 선우추(鮮于樞)와 강리노노(康里巎巎)의 행초서풍도 여러 필적에 가미되어 있어 원대 서풍의 다양한 수용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현황

『해동명적』의 판본은 목판본과 석판본 2종이 있다. 목판본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전집과 후집의 구분이 명확한 간인본과 전집·후집 구분 없이 내용을 축약하여 복각한 간인본이다. 전집·후집 구분이 명확한 간인본 중에서도 필자명 아래에 묵등(墨等: 나중에 세주를 새겨 넣기 위해 남긴 네모난 공간)이 남아 있는 간인본이 시기적으로 초각본에 가까운 판본으로 추정된다.

석판본의 판본도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석면에 균열이 없는 초기의 석판으로 인출한 간인본, 그리고 석판의 훼손 또는 분실로 인해 보각(補刻)하여 인출한 간인본이다. 여러 간인본을 비교 분석한 결과 크게 2차례의 보각이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며, 현재 남아 있는 간인본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여주 이씨 옥산문중본을 비롯하여 임창순(任昌淳) 구장본(舊藏本)과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된 경주 서백당본이 초기의 석판으로 인출한 판본에 가깝다.

의의와 평가

『해동명적』은 우리나라의 역대 명적을 널리 보급하려는 취지에서 간행된 법첩이다. 조선 초기 법첩의 간행 양태를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며, 진적(眞蹟)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15세기 이전 명필들의 필적이 다수 수록되어 있어 신라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서예사 연구 자료로서 매우 높은 가치를 지닌다.

참고문헌

「『해동명적』 목판본 연구」(유지복, 『서지학 연구』 65, 2016)
「『해동명적』 석판본 연구」(유지복, 『장서각』 36, 2016)
「해동명적 2책」(임창순, 『도협월보(圖協月報)』 11권 12호, 1970)
집필자
유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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