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 소탕된 야인들이 잠잠하다가 중기 이후 서북도에 다시 침범하기 시작했다. 삼포(三浦)를 중심으로 왜구의 반란도 자주 일어나 이를 방어하기 위한 대비책이 강구되었다.
이러한 정세에 따라 조정에서는 이들을 무마하기 위한 온건 정책을 펼치는 동시에,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행성(行城 : 출정한 군대의 주둔지 일대에 구축한 성)을 쌓거나 기존의 성을 수축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군비 강화책의 하나로 1504년(연산군 10)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그 뒤 1517년(중종 12) 다시 설치되어 임무의 중요성에 따라 삼공이 도체찰사가 되어 전담하였다.
그러나 임무의 막중함에 비해 문제가 크게 발생되지 않자 일단 관청과 소속 관원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있어, 도체찰사는 폐지되고 순찰사 2인만을 임명해 비상시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 뒤 임무를 수행하는 순찰사들이 자신들이 맡고 있는 임무가 중대함을 들어 중신이 전담하든가, 아니면 감령(監領)체계로 삼공이 관련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후자를 선택해 큰 사건이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중앙 정부의 중신회의에서 새로이 결정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런데 곧이어 축성사는 비변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1520년과 1522년 두 차례에 걸쳐 복설된 일도 있으며, 1555년(명종 10) 상설기관이 되었다. →비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