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탑이 발견된 태화사(太和寺)는 신라 선덕여왕대에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이 탑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종형 탑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표면에 십이지상을 새기고 감실을 마련했다. 탑의 크기는 1m 정도로 인도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널리 유행한 봉헌탑(奉獻塔)의 형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파손된 방형 기단부 위에 놓여져 있으나 원래 기단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1962년 5월 11일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동 반탕골 산비탈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이 신고하여 발굴된 것이다. 탑이 발견된 장소는 태화사 터로 알려진 장소이다. 『범우고(梵宇攷)』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폐사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8세기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탑은 발견 직후 당시 경남도청이 있었던 부산으로 옮겨 관리되다가 도청이 창원으로 옮겨감에 따라 울산 학성공원 내에 보관되었다. 이후 2011년 울산박물관의 개관에 맞춰 울산박물관으로 이건되었다. 1966년 지정당시 ‘태화사지 십이지상 부도’로 불리다가 2010년 12월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탑은 일부 파손된 직사각형 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이 대석은 사리탑이 발견되었을 때 주변에서 함께 발견된 것으로 형태나 크기에 있어 탑과는 연관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석은 파손되지 않은 부분의 길이가 179㎝, 파손된 부분은 125∼97㎝로 직사각형이며 긴 면의 측면으로 3구, 짧은 측면으로는 2구의 안상이 조각되었다.
탑은 종형으로 바닥에 최대 지름이 있고 위로 갈수록 좁아져 상부가 뾰족하게 돌출되었다. 탑의 중상단 한쪽 면에 폭 27㎝, 높이 30㎝, 깊이 29㎝로 감실형의 공간을 만들었다. 또한 감실의 외측으로는 낙수가 감실로 들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수구가 있고, 감실 내부로는 거칠게 다듬은 정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감실 아래로는 탑의 중하단을 돌아가며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다. 감실이 있는 아래 오상(午像-말)과 반대편 자상(子像-쥐)을 중심으로 시계 방향의 간지 순서로 배치하였다. 십이지상의 크기는 46∼48㎝ 정도이며 각각 13∼15㎝의 간격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상들의 마모가 심하여 정확한 얼굴과 자세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상반신은 모두 나신이며 합장 혹은 한 손을 들거나 지물을 들고 있는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비록 작은 상들이지만 어깨선을 둥글게 표현하고 허리선도 가늘고 부드럽게 표현하여 신체의 부피감을 느낄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종형의 구조물은 이 탑의 탑신부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원래 별도의 기단을 형성하고 최상단에 놓였다고 추정된다. 종형 구조물은 인도에서부터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는 구조물로 이용되었고, 인도와 서역 등에서 소형 봉헌탑으로 유행하였다. 태화사지 사리탑 역시 이 같은 기본 형태나 감실의 모습에서 봉헌탑의 모습과 동일하다. 특히 능묘조각에 등장하는 십이지상을 사리탑에 새긴 것은 드문 예에 속한다.
이 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종형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감실이 배치되고 십이지가 새겨진 유일의 사리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원래 기단부에 새겨진 안상 조각에 의거하여 통일신라말기인 9세기로 보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 부재와 탑은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탑을 자장율사가 통도사 금강계단과 함께 건립한 ‘계단형 불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어 우리나라 석조미술사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