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주전투 ()

고려시대사
사건
1010년(현종 1) 통주(通州: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벌어진 고려와 거란과의 전투.
이칭
이칭
삼수채전투, 통주성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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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통주전투는 1010년(현종 1) 통주에서 벌어진 고려와 거란의 전투이다. 거란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는데, 흥화진에서 공격이 실패하자 통주로 군사를 옮겨 왔다. 이 전투는 통주성 밖에서 이루어진 삼수채전투와 성안에서 이루어진 통주성전투로 구분되는데,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전개되었다. 삼수채전투에서는 고려 강조가 초반 우세로 자만한 틈을 타 기습한 거란에 패배하였으나, 통주성에서 거란군을 막아내 고려가 승리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강조의 패배 이후 개경까지 공격한 거란군의 후방 통로가 차단되었다.

정의
1010년(현종 1) 통주(通州: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벌어진 고려와 거란과의 전투.
개설

1010년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전개되는 통주전투는 삼수채전투(三水砦戰鬪)와 통주성전투(通州城戰鬪)로 구분된다. 삼수채전투는 통주성 밖에서 이루어진 전투로, 고려 강조(康兆)의 군대가 거란군에게 패하였다. 통주성전투는 삼수채전투의 승세를 탄 거란군이 통주성을 공격하여 이루어진 전투로, 중랑장(中郞將) 최질(崔質) · 홍숙(洪淑) 등의 고려군이 성을 끝까지 고수하여 고려가 승리하였다.

경과 및 결과

고려를 정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동원한 거란은 두 차례의 침공이 실패로 끝나자 성종(聖宗)이 친히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공격하였다. 거란군은 1010년 11월 중순에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공격하였으나 진장(鎭將) 양규(楊規) · 이수화(李守和) 등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하여 성을 함락하는 데 실패하였다. 이에 11월 23일 군사를 통주로 옮겨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이곳에서 고려와 거란 사이의 전투가 재개되었다.

당시 통주에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조가 군사 30만 명을 거느리고 거란에 대비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강조 휘하의 고려군은 통주성을 나와 청강의 3개 지류가 합쳐지는 합수목인 삼수채 지역에서 거란군을 만나 초반에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초반의 우세에 자만한 강조가 전장에서 장기를 두는 등 지휘를 소홀히 하였고, 이때 거란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삼수채를 기습 공격하여 강조를 생포하고 3만여 급을 베었다.

거란군은 삼수채전투의 승세를 타고 통주성까지 공격하였으나 중랑장 최질 · 홍숙과 방어사(防禦使) 이원귀(李元龜), 부사(副使) 최탁(崔卓) 등이 성을 굳게 지켜 결국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부근의 여러 다른 성만을 점령하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삼수채전투에서 고려군을 총지휘한 강조의 패배는 이후 전쟁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는 거란이 침입하자 그해 10월 주력부대 30만 군을 통주에 배치하여 거란군을 저지 · 격퇴하고자 하였다. 전쟁 초기 흥화진 전투의 승리로 고려는 전투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획득함과 동시에 거란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그러나 강조가 거란군의 역량을 간과하고 얕보아 삼수채 전투에서 패퇴함으로써 고려는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고 결국 곽주(郭州) · 안주(安州) · 숙주(肅州)에서 장수들이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로 인해 곽주가 점령되었고 단기간 내에 거란군은 청천강 이남을 넘어 개경까지 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통주성전투에서는 고려가 승리하였는데, 이는 통주의 군 · 민(軍民)이 외적에 완강히 저항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반면 거란군은 통주성을 점령하지 못함으로써 후방통로가 차단되고 회군할 경우 반격의 발판을 제공하게 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삼수채전투에서 패배한 병력은 그해 12월 16일에 흥화진의 양규에게 합세하여 다음날 거란군의 선두가 서경을 공략하고 있는 동안 이들에게 함락된 곽주를 공격, 거란 주둔군을 격멸하여 성을 다시 빼앗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전쟁과 역사』2-거란·여진과의 전쟁-(임용한, 혜안, 2004)
『고려 거란 전쟁』(안주섭, 경인문화사, 2003)
「고려 현종대의 대거란전쟁과 그 정치·외교적 성격」(구산우,『역사와 경계』74, 부산경남사학회, 2010)
「11세기 대거란 영역 분쟁과 고려의 대응책」(김우택,『한국사론』55, 2009)
「10∼11세기 고려와 요의 영토 정책」(김순자,『북방사논총』11, 2006)
「단구와의 항쟁」(김상기,『국사상의 제문제』2, 국사편찬위원회,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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