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서양의 오르간(organ)이라는 악기의 한자식 번역어이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오르간 중에서 리드 오르간(reed organ)을 일반적으로 풍금이라고 한다.
풍금, 즉 리드 오르간은 파이프를 사용하지 않고 프리 리드를 사용하며, 바람을 뿜어내는 식과 바람을 빨아들이는 식이 있는데, 우리 나라의 풍금은 대부분 후자에 속한다.
풍금의 기원은 기원전 수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팡의 피리’·‘시링크스’ 등과 같이 몇 개의 파이프를 조립하여 입으로 부는 악기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악기는 우리 나라의 생황(笙簧)과 비슷한 원리의 악기이다.
이후 기원전 265년 크테시비오스(Ktesibios)가 물의 힘으로 공기를 보내어 손으로 판을 열고 닫아 파이프를 울리게 하는 악기를 발명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풍금에 속한다.
근대적 의미의 풍금은 17세기경 바로크시대에 페달(pedal)의 확립과 함께 만들어졌으며, 피아노와 함께 조율체계 평균율(平均律 : 한 옥타브를 12개의 반음으로 균등하게 나누는 조율법)로 채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풍금은 독주 악기로서 뿐만 아니라 반주 악기로 쓰이며, 특히 종교음악과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풍금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각종 문헌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해 볼 뿐이다.
풍금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실학자들의 저서에서 나타난다.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집 湛軒集≫(1762)에서 북경에 설치되었다는 것과 천주교회 내의 풍금에 대한 인상기를 기술하고 있다.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1778)에서 풍금 등 서양음악을 들은 인상기를 기록하고 있다.
우리 나라에 풍금이 들어온 것은 대략 1896년경 선교사에 의한 것으로 보는데, ≪한국양악100년사≫에서는 증언을 토대로 그것을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1909년 4월 27일자 ≪황성신문≫의 기사는 관립고등학교에서 풍금을 사용하고 있으며,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풍금 연주를 관람시켰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한 이 무렵 김인식(金仁湜)·김영환(金永煥) 등이 선교사한테 풍금을 배워 각종 음악회에서 연주하였는데, 이들이 우리 나라 최초의 풍금연주가로 기록된다. 이로 미루어 보아 풍금은 대략 1896년경에 선교사들을 통하여 들어와, 1910년 이전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한국의 음악문화과정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 이후부터는 각종 학교와 교회에서 학교교육과 사회교육 그리고 기독교 전도의 수단으로 사용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풍금은 서양음악 보급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다.
풍금이 한국음악사에 끼친 영향은, 첫째 음악교육의 도구로 사용되어 서양음악의 교육과 보급에 일조를 하였다는 점, 둘째 찬송가의 반주 악기로서 일반인들로 하여금 서양식을 음체험하게 하였다는 점, 셋째 피아노와 함께 우리 전통음악적 음 감각을 서양의 평균율로 변질시켰다는 점, 넷째 서양음악의 원형적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