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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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
인물
해방 이후 「산유화」, 「초혼」, 「진달래꽃」 등을 만든 작곡가.
인물/근현대 인물
출생 연도
1917년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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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산유화」, 「초혼」, 「진달래꽃」 등을 만든 작곡가.
내용

서울 출생. 일본의 동경국립음악학교를 중퇴하고 동경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하였다. 스승 하라(原太郎)의 영향 속에서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의 기법을 받아들여 작곡하였으며, 비조성(非調性:비화성적인 조체계를 이루는 것) 음악에도 심취하였다. 1943년 당시 일본의 급진 작곡가 그룹인 신흥작곡가 연맹의 5주년 기념음악제에서 피아노 소나타를 발표하면서 데뷔하였다.

1944년 동경에서 첫 번째 작곡발표회를 가졌는데, 이때도 무조적(無調的)인 경향의 피아노삼중주곡 등을 발표하였다. 1945년 이전까지의 작품은 무조적 경향과 무소르크스키 등의 영향이 강한 사실적 작품이 주종을 이루어 박노춘(朴魯春) 시의 「탱자」, 오장환(吳章煥) 시의 「장렬(葬列)」·「양(羊)」 등 호소력 있고 예술성 있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1945년 이후에는 민족 음계에 바탕을 둔 가곡 등을 작곡하여 김소월(金素月) 시의 「산유화(山有花)」·「초혼」·「진달래꽃」 등 다섯 편의 가곡을 『산유화』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산유화」는 서정가곡으로 1948년 그가 월북할 때까지 방송매체 등을 통하여 소개되면서, 민족 정서가 어린 대중 가곡의 표본을 이루고 민속조가 짙은 가곡 창작의 유형을 정립하였다.

또한 「교향조곡」·「피아노협주곡」 등은 당시 연주계 상황으로 발표하기 어려워 발표되지 못하였다. 1945년 이후에는 남로당 가입 등 정치에 참여하여 「인민항쟁가」 등을 작곡하였고, 윤이상·나운영·김희조·장일남 등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민족음계 구사 기법 등을 개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가곡전사』(이상만, 금성출판사, 1968)
『음악과 현실』(박용구평론집, 민교사, 1949)
『김순남가곡집』(1946)
『음악예술(音樂藝術)』(동경(東京)음악지우사(音樂之友社), 1982.2.)
『문예중앙』(중앙일보사, 1981.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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