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남은 일제강점기로부터 대한민국 건국 초기에 활동한 월북 작곡가이다.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으며,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1938년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 작곡부에서 공부하였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음악의 정신적 지주격인 하라 타로를 만나 음악을 민중의 삶 속에서 찾고자 하는 사상적 영향을 깊게 받았다. 해방 직후 조선음악건설본부를 결성하고 첫 해방가요 「건국행진곡」을 작곡하였고, 일제 잔재 청산과 진보적 민족 음악 건설을 주장하였다. 월북으로 남한에서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88년 해금 조치로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비화성적인 조 체계를 이루는 비조성(非調性) 음악에 심취하였으며, 1943년 당시 일본의 급진 작곡가 그룹인 신흥작곡가연맹의 5주년 기념 음악제에서 피아노 소나타(piano 주4를 발표하면서 데뷔하였다.
1945년 이전까지의 작품은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Igor 주5의 무조적 경향과 무소르크스키 등의 영향이 강한 사실적 작품이 주종을 이루는 작품들을 발표하였으며, 피아노 소나타 제2번과 피아노 3중주 제1번, 자신의 결혼식 때 반주 음악으로 쓴 피아노 3중주 「결혼」, 가곡 「철공소」 등이 대표적이다.
해방 이후에는 해방가요 외에도 2권의 가곡집과 주6 제1번, 피아노 주7 제1번, 합창이 붙은 교향곡 「태양없는 땅」 같은 본격적인 관현악 작품들도 작곡하였고, 교향곡과 협주곡의 경우는 해당 장르에서 한반도 최초의 작품들로 기록되고 있다. 민족 음계에 바탕을 둔 가곡 김소월(金素月) 시의 「산유화(山有花)」 · 「초혼」 · 「진달래꽃」 등 다섯 편의 가곡을 『산유화』라는 이름으로 출간하였으며, 「산유화」는 서정 가곡으로 1948년 방송 매체 등을 통하여 소개되면서 민족 정서가 어린 대중 가곡의 표본을 이루고 민속조가 짙은 가곡 창작의 유형을 정립하였으며, 민족 음계 구사 기법 등을 개발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면서 좌익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고, 이를 피해 김순남도 대구 10·1 사건을 노래한 「인민항쟁가」의 작곡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월북하였다. 그 뒤 평양에서 조선음악가동맹 부위원장과 평양음악대학 작곡과 교수를 역임하였으며, 주9 「인민유격대」와 주8 「승리」, 주10 「영웅 김창걸」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52년에는 북한 정부의 후원으로 소련에 유학했고,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음악원에서 아람 하차투리안에게 배웠다. 불행하게도 유학 생활은 종전과 동시에 북한에서 소환 명령이 내려져 급히 귀국하였고, 남로당 일파로 간주되어 심한 비판을 받고 1958년에 모든 창작 권리를 빼앗기고 함경남도 신포의 조선소 주11으로 숙청당했다. 1960년대 중반에 주14 다시 창작 권리를 되찾았고, 이후 몇 년 동안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주12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와 바이올린 독주곡 「이른 봄」과 함경남도 일대의 민요를 주13 기록물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의 배경에는 이상적인 민족성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적 진취성과 사회주의적 혁명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김순남의 음악은 기존의 음악적 환경과 현실을 부정하였기에 가능하였다고 보는 견해들이 많다. 특히 그가 기독교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는 점, 일본적 경향을 따르지 않고 민족적, 시대적 감성에 예민했던 점, 해방 이후에는 좌익 활동이 왕성했던 점, ‘혁명성과 진취성’을 식민지 시기부터 길러 왔다는 점 등이 부각된다.
월북 때문에 남한에서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88년 해금 조치 이후 연구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