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주(晉州). 아버지는 하정발(河程拔)이며, 어머니는 조녕(趙寧)의 딸이다. 1471년(성종 2) 진사(進士)였는데 궐원(闕員)이 생기거든 서용하라고 명을 받았고, 이듬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477년(성종 8) 경상도감찰이 되었는데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행차에 포자(布子)를 부탁해 준 죄를 범하여, 좌죄(坐罪)되어 향리로 파출되자 유학(幼學) 이은(李誾) 등 33인이 다음과 같은 소를 올렸다.
“그의 학문이 정박(精博)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아니하여, 학도들이 소문을 듣고 떼지어 모여서, 때때로 문호(門戶)가 용납할 수 없을 적이 있었고 이로 인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인(成人)에 끼인 자도 한둘이 아닙니다. 지금 신 등은 제자(弟子)의 직분을 가지고, 거의 사숙(私淑)하여 성취(成就)하고자 의뢰한 지가 이미 여러 해가 되었으니 선비를 높이는 뜻을 중히 여기셔서, 특별히 다시 서용(敍用)하기를 허락해 주십시오.”라는 소를 올렸다.
이에 다시 서용되어 고신(告身: 신분사령증)을 돌려 받고 사유(師儒)가 되었다. 1482년(성종 13) 임원준(任元濬)·허종(許琮) 등과 함께 『소문충공집(蘇文忠公集)』의 난해(難解)한 곳을 주해(註解)하였다.
그러나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으로 배율시(排律詩) 10운(韻)이 관직방(館直房) 벽(壁)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곧 찢어 버렸다 하여 탄핵을 받고 의금부에서는 형장(刑杖)으로 신문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생원 권수평(權守平) 등이 다시 서용해 달라는 소를 올렸다. 1485년 경주교수(慶州敎授)를 지내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으며, 이듬해 고성현령(固城縣令)을 지냈고, 1490년 영덕현령(盈德縣令)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