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윤탁 한글 영비 (서울 한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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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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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문자
유적
국가유산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있는 조선시대 한글로 새긴 국내 유일의 비.
이칭
이칭
한글고비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서울 李允濯 한글靈碑)
분류
기록유산/서각류/금석각류/비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2007년 09월 18일 지정)
소재지
서울 노원구 하계1동 12번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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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노원구에 있는 조선시대 한글로 새긴 국내 유일의 비.
내용

일명 영비(靈碑)라고도 한다. 200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12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석은 조선 중종 때의 문인 이문건(李文楗)이 돌아가신 아버지 이윤탁(李允濯)과 어머니 고령신씨의 합장묘 앞에 스스로 글을 써서 새긴 묘갈로 이수(螭首)와 귀부(龜趺)가 없고 회갈색의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방부(方蚨)와 비신(碑身)만으로 되어 있다.

비의 높이는 143.5㎝, 폭은 64.5㎝, 두께는 19.3㎝이며, 사각형의 받침돌인 방부는 가로 95㎝, 세로 48㎝로 아무런 조각이 없는 장방형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비의 본문 끝에 가정(嘉靖) 15년에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1536년(중종 3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비석은 처음 1535년 입석 때에는 양주 노원면 율이점(지금의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원자력병원 뒷산 태릉부근)에 있었으나 1년 후 현위치로 묘가 이장됨에 따라 현 묘역에 실존하고 있다.

이 비석에는 비양(碑陽)과 음지(陰誌)의 일반적 비문 외에 동쪽 측면에 불인갈(不忍碣), 서쪽에 영비(靈碑)라는 제목 아래 한자와 한글로 특이한 추기문이 새겨져 있다.

특히 한글로 새긴 비문은 훈민정음 창제 이래 최초의 한글이 새겨진 금석물로서,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조선 500년 동안 유일무이한 현존 최고의 희귀한 금석문이라는 점에서 국가유산의 가치가 매우 크다.

또한 16세기 한글 고어의 모습을 보여주는 국어학의 학술자료로서, 훈민정음 창제 초유의 한글 서예연구자료로 매우 귀중한 국가유산이다.

비의 앞면에는 일반 묘표석과 같이 피장자인 권지승문원부정자이공휘윤탁(權知承文院副正字李公諱允濯)과 안인신씨적고령(安人申氏籍高靈)의 합장지묘(合葬之墓)라는 비양이 해서체로 중앙에 2줄로 종서(縱書)되었고, 글자 크기는 가로 4.5㎝, 세로 6.5∼7㎝이다.

그리고 뒷면에는 상단에 가로 5.5㎝, 세로 6∼6.5㎝의 해서를 가로 쓴 고비묘갈음지(考妣墓碣陰誌)라는 제액이 있고, 그 아래 해서체 종서로 쓴 음지가 19행 71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 크기는 가로 2∼2.5㎝, 세로 2.5∼3㎝이다.

음지의 내용은 성주이씨(星州李氏) 자기 가문의 가계를 밝혀 가문을 찬양하고, 돌아가신 부모의 유덕을 추모하고 있으며, 끝으로 자손의 망극한 슬픔을 서술하고 있다, 이는 한문묘비문장의 공통적인 문체이자 양식이다.

비의 양측면의 내용은 이문건의 높은 효심을 표현한 것으로 동측면의 불인갈은 “위부모입차수무부모하인훼지석불인범칙묘불인능명의만세지하가지면부(爲父母立此誰無父母何忍毁之石不忍犯則墓不忍凌明矣萬世之下可知免夫)”라고 새겨져 있다.

이를 해석해 보면 “부모를 위하여 이 비석을 세운다. 누가 부모 없는 사람이 있어서 어찌 차마 이 비석을 훼손할 것인가? 비를 차마 깨지 못하리니 묘도 또한 능멸당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만세를 내려가도 가히 화를 면할진저.”

이렇듯 지극한 효심으로 후세에 누가 이 비석과 묘를 해칠 것을 염려하여 《맹자 孟子》의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상(上)에 나오는 불인지심(不忍之心) 즉 차마 하지못하는 마음에 호소한 글이다.

위의 불인갈 세자는 가로 6㎝, 세로 6.5㎝의 해서로 쓰고 그 아래에 다시 85㎝까지 가로 3㎝, 세로 3.5㎝의 가는 글씨로 두 줄의 종서로 새겨져 있다.

비의 서측면에는 이 평범한 비갈을 영비가 되게 하고 국가유산으로 지정되게 한 한글 추기가 있다. 영비(靈碑) 두 자는 가로 4㎝, 세로 4.5㎝의 한자 해서체이고, 그 아래 65㎝까지는 한글이 전서체 두 줄로 종서되어 있다.

글자는 모두 30자이며 글자 크기는 가로 2㎝, 세로 3㎝로 훈민정음 반포시의 판본체, 한글 고체, 한글 전서체의 글씨형을 보여주고 있다.

내용은 신령한 비석이라는 제목 아래 “이 비석은 신령한 비석이다. 비석을 깨뜨리거나 해치는 사람은 재화를 입을 것이다. 이것은 글 모르는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다”라고 당시의 훈민정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글 내용은 동측면의 불인갈과 비슷하며 당시 한문을 읽지 못하는 나뭇꾼이나 목동이라도 한글을 읽을 수 있으므로, 혹시라도 이들이 비를 깨뜨릴까 염려하여 일종의 경고문으로 쓴 것이며 그 속에 깃든 효심은 불인갈보다 더 잘 나타나 있다.

이 비문에 힘입은 듯 5세기가 지난 현재까지 잘 보전되고 있으며, 실제로 주민들에 의해 신물(神物)로 여겨져 국가유산으로 지정되기 전까지 주민들은 이 비석에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이 비석을 세운 이문건은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李稷)의 5대손으로 중종의 시책(諡冊)을 쓰도록 발탁되었을 만큼 이름난 서예가였다. 벼슬은 통정대부 승정원부승지를 지냈으며 사화에 연좌되어 벼슬길이 불안하였고, 끝내 성주에 유배가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후손들이 충청북도 괴산군 문광면에 살면서 서울이윤탁한글영비의 존재가 묻혀 있다가 1925년 후손에 의해 재발견되어 『대동기문(大東奇文)』에 문헌상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광복 후 역사학자 · 국문학자들에 의해 소개 연구되어 그 가치가 평가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대동기문(大東奇聞)』(강효석, 1926)
『서울육백년사 문화사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서울문화재대관』(서울특별시, 1987)
「하계동소재 국문고비 연구」(김홍철,『향토서울』40, 1982)
「양주의 영비 각자」(이훈종,『한글』125,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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