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룡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동지중추원사, 판충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61년(세조 7)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함길도도절제사|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판충주목사(判忠州牧事)
목차
정의
조선 전기에, 동지중추원사, 판충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생애 및 활동사항

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한승순(韓承舜)이다. 1421년(세종 3) 김점의 사위로 좌랑(佐郞)을 지냈다. 1430년(세종 12) 모화루의 개천(開川)을 수축하는 일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하여 파면되었다가 1432년에 함길도경력(咸吉道經歷)이 되어 백성을 무휼(撫恤)하였다.

이듬해 함길도도절제사인 경력(經歷)으로 거을가개자(巨乙加介子) 등이 400여 기병(騎兵)을 인솔하고 종성부(鍾城府) 보청평(甫靑平)에 들어와 도적질하므로, 700여 기병을 영솔하여 적 5인을 쏘아 죽이고 말 34필을 빼앗았다.

또 함길도도절제사 경력(經歷)으로 여러 종류의 올적합(兀狄哈) 1,000여 인이 장차 들어와 도둑질하려 하자 적변을 미리 알고 격파하였다. 그리고 보청포 싸움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한 자급을 올려 받았다.

이듬해 의정부에서 전라도 감련관(監鍊官)인 대호군(大護軍)으로 본도에 순행할 때 역마(驛馬)를 함부로 쓰고, 수종꾼이 7, 8명이 역마를 타고 다녀 각 고을에 폐를 끼치고, 또 본디 청렴하지 못해서 전에 평안도·함길도에 사절로 갔을 때도 청렴하지 못하다는 이름이 있던 자이므로 교체할 것을 요구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1451년(문종 1)에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에 이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겸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가 되었다. 1454년(단종 2) 경원부사(慶源府使)로서 옷 한 벌씩이 하사되었으니, 해청(海靑)을 잡아서 바쳤기 때문이다. 같은 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고, 이듬해 경상도 도절제사(慶尙道都節制使)가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경상도우도도절제사(慶尙右道都節制使)를 거쳐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원종공신 2등이 되었다. 이듬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거쳐 판충주목사(判忠州牧事)가 되었다.

1459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1461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가 되었으나 죽었다. 세조는 쌀·콩 아울러 20석, 종이 100권, 유둔(油芚) 3부(部), 관곽(棺槨) 등을 부의(賻儀)로 내려 주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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