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회지(晦之). 한입(韓岦)의 종손으로, 할아버지는 한석준(韓碩俊)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한빈(韓彬)이며, 어머니는 정광후(鄭光後)의 딸이다.
1691년(숙종 17) 사마시를 거쳐, 1702년(숙종 27)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1704년 정언이 되었다. 이듬 해 정월 궁방 하인들의 작폐(作弊)를 상소하고, 그 해 2월 사서를 거쳐 문학·지평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과거 폐단에 대해 다시 상소하고, 1707년에는 대신 접대에 있어 임금의 예모부족(禮貌不足)에 대해 상소하였다.
1710년 장령이 되었고, 1712년 오수원사건(吳遂元事件)을 소론(疏論)했으며, 이듬 해에는 유혁연사건(柳赫然事件)을 임금에게 자세히 아뢰었다.
같은 해 7월 헌납(獻納)이 되었고, 사은사의 정사 임창군 혼(臨昌君焜), 부사 권상유(權尙游)의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돌아온 뒤 논사소(論事疏)를 올려 북막평사(北幕評事)의 임명을 신중히 할 것을 간하였다.
1715년 보덕이 되었고, 이듬 해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대마도에서 요구한 인삼 무역을 왕에게 보고해 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듬 해 경상어사 이명언(李明彦)의 복명에 따라 행정실책으로 문책을 당해 파출되었다.
같은 해 일본통신사에게 주어 보내는 문서의 문자 표시 문제를 해결했고, 1718년 승지가 되었다. 이듬 해 승지로 동궁에 입대(入對)해 세자의 감정 통제에 대해 진달하였다.
1720년 숙종국상에 정재륜(鄭載崙)이 성기(省記: 병조에서 입직하는 낭청이 매일 궁궐을 경비하는 장수에게 교부하는 군호와 궁궐 각처에 입직하는 관원·하례 및 각 군영에 입직하는 장수들의 이름을 써서 승정원을 거쳐 왕에게 올리는 서면) 없이 숙직을 하자 세자(뒤의 경종)에게 문책하도록 상소하였다.
1721년(경종 1) 11월 강원감사를 지냈고, 이듬 해 김동필(金東弼)의 상소에 김일경(金一鏡)의 일로 논란이 있다가 1723년 11월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았다. 곧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한 뒤 고향에 돌아가 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