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이 ‘발해(渤海)의 동쪽나라’라는 뜻으로 불렀는데 이를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사용하였다. 특히,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많이 쓰였는데, 이는 해상으로 중국에 내왕하던 시대의 특징으로 보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해동의 일(海東之事)’·‘해동불법의 시작(海東佛法之始)’이라는 표현이 보이며, 백제인이 의자왕을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칭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해동고기(海東古記)』라는 원전이 인용되어 있으며 ‘해동신라’라는 명칭도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신행선사(神行禪師)의 비문의 표제는 「해동고신행선사지비(海東故神行禪師之碑)」라고 쓰여 있다.
또한, 발해국이 드디어 ‘해동성국(海東盛國)’이 되었다고 한 예도 있으나, 이 밖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와 있는 ‘해동’이라는 표현의 대부분은 고려시대 일연(一然) 자신의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에는 초기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를 의천(義天)은 『해동삼국사』로 인용해 쓴 바도 있으며, 『고려사(高麗史)』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해동비록(海東秘錄)』이라는 서명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문종 때 교육에 많은 노력을 경주한 최충(崔冲)을 당시 사람들은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칭하였다.
또한, 1102년(숙종 7)에 처음으로 주조된 화폐의 명칭이 ‘해동통보(海東通寶)’였으며, 고종 때 각훈(覺訓)이 편찬한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도 있다.
조선시대에도 해동이라는 용어가 쓰인 예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1장에 “해동육룡이 날으셔”에서 보이며, 심광세(沈光世)가 지은 『해동악부(海東樂府)』를 필두로 10여편의 해동악부가 있으며, 한치윤(韓致奫)이 편찬한 『해동역사(海東繹史)』등이 있다. →국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