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악잡영」은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지은 신라오기(新羅五伎)의 모습을 읊은 한시이다. 『삼국사기』 권32 악지의 신라악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향악잡영」은 신라의 악무 중에서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 를 한시로 묘사한 것이다. 「금환」은 황금빛을 칠한 둥근 기구를 절묘하게 다루는 기예이다. 「월전」은 난장이 무리가 음악에 맞추어 희극적인 몸짓으로 연희하는 놀이이다. 「대면」과 「속독」은 탈춤으로 여겨진다. 「산예」는 오늘날의 사자춤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 신라오기(新羅五伎)의 모습을 읊은 칠언시로 모두 5수이다.
『삼국사기』 권32 악지(樂志)의 신라악 항목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편자 김부식(金富軾)이 어떤 자료에서 이를 취하여 신라악 말미에 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김부식 생존시에 유포되고 있던 최치원의 문집에서 취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향악’이라는 용어는 외래 악무인 아악(雅樂)과 당악(唐樂)에 대한 민족악무의 의미로 사용한 듯하다. 이 용어는 현전 기록에서 최초로 사용된 것이다. 또한 ‘잡영’이라는 용어도 한시의 제사(題辭)로서 효시이다. ‘잡영’은 최치원 이후에 두루 사용되었다. ‘잡영’의 그 대표적 예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도산잡영(陶山雜詠)」이다.
「향악잡영」의 내용은 신라의 악무 중에서 「금환(金丸)」 · 「월전(月顚)」 · 「대면(大面)」 · 「속독(束毒)」 · 「산예(狻猊)」 등 오기(五伎)의 모습을 한시로 핍진(逼眞)하게 묘사한 것이다.
최치원이 향악으로 규정한 이 오기는 신라에서 자생한 고유악무가 주류이다. 그러나 그 일부는 서역이나 당(唐)에서 들어와 토착화된 악무도 있는 듯하다. 그 대표적 예가 사자춤으로 알려진 「산예」이다. 사자춤이 서역 사자국(獅子國)의 악무인 점은 알려진 사실이다.
주목되는 것은 이 「산예」가 신라가 합병한 가야국(伽倻國)의 사자기(師子伎)와도 연관된다는 것이다. 신라의 「산예악무」와 가야의 「사자기」는 유사한 것이거나 아니면 신라가 가야의 「사자기」를 수용한 것일 수도 있다. 삼한(三韓)을 통합한 신라가 그들이 복속한 국가의 악무를 수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악조에 가야악무( 우륵의 十二曲)를 포함시킨 사실은 예악사상(禮樂思想)의 발로로 인정된다. 「향악잡영」의 「금환」은 황금빛을 칠한 둥근 기구를 절묘하게 다루는 기예로서 중국의 유명한 영인(伶人) 의료(宜僚)보다 그 솜씨가 뛰어나다고 극찬했다. 그런데 이 「금환」놀이가 어째서 파도를 잠재우는지는 연구될 과제이다.
「월전」은 난장이 무리가 음악에 맞추어 희극적인 몸짓으로 연희하는 놀이이다. 「대면」은 가면극으로 유추된다. 「속독」은 봉두남발의 괴이한 탈을 쓴 사람이 북소리에 맞추어 발랄하게 춤추는 모습을 그렸다. 「대면」과 「속독」은 탈춤으로 여겨진다. 「금환」과 「월전」은 탈의 착용 여부가 불분명하다. 「향악잡영」의 「산예」는 오늘날의 사자춤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군유’라는 시어는 「월전」에 나오는데, 왜 「속독」에서 언급하고 있는지 미상이다. 이 부분을 삭제할 필요가 있다.
민족악무는 어느 시대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 생명력은 길고도 강인하다. 오늘의 북청사자춤과 안동의 하회탈춤, 그리고 민족나례(民族儺禮)인 처용무(處容舞) 등에서 최치원이 묘사한 ‘신라오기’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금환」 · 「월전」 · 「대면」 · 「속독」 · 「산예」 등의 신라오기는 소멸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민족악무에 살아 있음이 분명하다.
「향악잡영」 5수는 민족문화와 민족악무, 특히 신라악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며 국제적 인물인 저자의 이같은 민족악무에 대한 인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