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향약은 중국 북송(北宋) 말엽 산시성 남전현(陝西省籃田縣)의 여씨(呂氏) 일문 중 도학자로 명성을 떨친 여대충(呂大忠) 4형제가 일가 친척은 물론, 향리 전체를 교화하기 위해 처음으로 마련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여씨향약 呂氏鄕約≫으로 ≪주자대전 朱子大全≫에 ‘주자증손여씨향약’이라고 실려있다.
이 향약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것은 주자학의 전래와 거의 같은 시기로 보인다. 이렇게 전래된 향약이 우리의 전통적인 계조직과 결합된 사례로 확인된 것 중 연대가 가장 빠른 것이 정극인(丁克仁)에 의해 실시된 전라북도 태인(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지방의 고현동(古縣洞) 향약계이다.
고현동 향약계는 세종 말년에 조직되었던 것 같으나 실시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본격적으로 실시된 것은 1475년(성종 6) 이후부터였으며, 500여 년이 넘게 지금도 계속 실시되어 오고 있다.
처음에는 계조직으로 출발하였다가 뒤에 향약계로 발전한 것으로 전라남도 영암군 구림리(鳩林里)의 대동계(大同契)가 있다. 이 대동계는 1565년(명종 20)에 조직, 실시되었으며, 왜란 직후인 1609년(광해군 1)에 향약계로 발전, 복구되어 현재까지 실시되고 있는 계회 조직이다.
위의 두 향약계보다 연대는 뒤지지만 좀더 넓은 지역인 목(牧)을 단위로 실시한 향약계가 있다. 이이(李珥)가 1571년(선조 4) 청주목사로 부임해 실시하기 시작한 <서원향약 西原鄕約>이 향약과 계조직이 결합된 향약계로 유명하다. 후대에 기호지방에 미친 영향도 컸다.
이이가 1577년 해주의 야두촌(野頭村)을 중심으로 실시한 <사창계약속 社倉契約束>은 사창과 계와 향약이 결합된 사창 향약계로 특별한 것이었다. 이러한 향약계는 왜란을 치른 뒤 말기로 내려올 수록 더욱 성행하였다.
조선시대 계자료들의 목적과 성격을 분류한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4분의 1에 가까운 것이 향약계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이로 보아 그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위와 같이 향약조목과 계규약(契規約)이 혼합되거나, 향규조목(鄕規條目)과 향약조목이 결합된 규약들을 ‘향규약(鄕規約)’이라고 고쳐 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향약계들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와 근대적인 사법제도(司法制度)가 실시되면서 점차 향약적 성격은 퇴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