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권. 필사본. 원래는 ≪호곡만필 壺谷漫筆≫의 하권에 해당하는 것이다. 홍만종(洪萬宗)이 ≪시화총림 詩話叢林≫을 엮으면서 그 중 67항목만을 가려뽑아 ≪호곡시화≫라고 명명하였다.
≪호곡만필≫ 권1·2에서는 선조들의 사적 및 가계를 서술하고 자신의 지내온 경력을 말하였다. 권3의 첫머리에 <호곡만필하병서 壺谷漫筆下幷敍>라 하여 서문을 싣고 시평 및 시화를 기록하였다.
≪호곡시화≫의 서문에서 1680년(숙종 6)에 썼음을 밝혔다. 기록한지 10년이 지나고 보니 생각도 변하여 평론함에도 차이가 있으나 더 늙기 전에 써서 잘 간직해두려고 한다고 하였다. 이 서문에 의하면, 일단 1680년에 탈고한 것을 1689년에 다시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호곡시화≫는 각 내용에 맞게 소제목을 붙였다. ① 시평·선시(選詩), ② 당시(唐詩), ③ 송시(宋詩), ④ 명시(明詩), ⑤ 동시(東詩), ⑥ 시화, ⑦ 여평(儷評)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선집인 ≪기아 箕雅≫를 직접 편찬하기도 한 남용익은 선시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는 먼저 시평과 선시의 어려움을 말하고, 시에 대한 안목과 함께 일정한 선시의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다음은 중국의 당시·송시·명시의 특징과 각 시대의 시인의 시를 평하였다.
남용익은 우리나라 시에 대하여 논한 동시항목에서는 고려시대 시인 25명과 조선시대 시인 54명을 뽑아 각기 두 자씩의 평어로써 시의 특징을 나타내었다. 이인로(李仁老)는 요묘(要妙)라 하였고, 진화(陳澕)는 유려(流麗)라고 하였으며, 서거정(徐居正)은 섬대(贍大)라 한 것 등이다.
고려시인 중에서 색운(色韻)이 정아(精雅)한 사람으로 이제현(李齊賢)을 꼽고, 성률(聲律)이 청신한 자로 정지상(鄭知常)을 꼽았다. 기력의 웅장함으로는 이규보(李奎報)를 제일로 쳤다. 조선시대의 시인 중에서는 조격(調格)이 탁매(卓邁)한 이로 박은(朴誾)을 꼽았고, 정경(情境)의 해화(諧和)함은 권필(權韠)을, 체재의 기발함은 정두경(鄭斗卿)을 꼽았다.
남용익의 풍격론은 당·송 이래 중국의 시비평가들이 전개해 온 논의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것를 받아들여 확대하고 세분하여 적용하고 있다. 이것은 중국 풍격론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변용시켜 자신의 이론으로 체계화한 발전적인 학문태도를 나타내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시평은 특히 기교론에 의한 시평과 원류비평(原流批評)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는 당시에 통용되던 비평경향이었다. ≪호곡시화≫는 고려와 조선의 시화를 정리하면서 동시대인인 김득신(金得臣)을 비롯한 자신의 친우·친족들의 이야기도 곁들이는 등 광범위한 내용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덧붙여 자신의 시 가운데서 몇 구절을 스스로 가려 뽑아 후세 사람이 평가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책은 다양한 시품(詩品 ; 시의 격식이나 품격)을 보여주고 시 비평에 대한 명확한 의식을 지니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