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차산(次山). 홍상보(洪尙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영(洪齡)이고, 아버지는 홍원숙(洪元淑)이며, 어머니는 영의정부사 황보인(黃甫仁)의 딸이다.
생원(生員)으로 1469년(예종 1) 추장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1472년(성종 3)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1473년 의경왕(懿敬王)의 묘를 조성하고 신주와 영정을 봉안하고 제사드린 신하들에게 상을 줄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참석하여 아마(兒馬) 1필이 하사되었다.
1474년 낭청(郎廳)에 이어 1477년(성종 8)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1483년 예조정랑(禮曹正郞)을 거쳐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으로 학식이 널리 통하고 일에 임하여 자세하고 민첩하여서 두루 쓸 만한 재주가 있다 하여 천거되었다.
1484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에, 1485년 정희왕후의 부묘(祔廟: 삼년상을 마친 뒤 신주를 태묘에 모심.) 때 공이 있다 하여 한 품계를 올려 받았다. 1486년황해도와 평안도에 파견되어 각 역의 찰방(察訪)과 역승(驛丞)의 불법한 일을 살폈다.
1488년 가례도감낭청(嘉禮都監郎廳)을 거쳐 대비가 강녕한 까닭으로 논공할 때 아마(兒馬) 한 필과 활 1장이 하사되었다. 1489년금화와 평강에 내려가 수외의 군기를 적간하였으며, 체찰사(體察使) 이철견(李鐵堅)의 종사관으로 황해도 도적을 잡는 데 공을 세웠다. 1490년 통정대부(通政大夫) 해주목사(海州牧使)로, 1493년 통정대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