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문숙(聞叔). 아버지는 홍창섭(洪昌燮)이며, 어머니는 해평황씨(海平黃氏)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은 뒤 이항로(李恒老)에게 배웠다.
1876년(고종 13) 일본과의 수호조약이 맺어지려 할 때 유생과 더불어 반대 상소를 가지고 상경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 같은 뜻에서 반대 상소를 올린 당시 참판 최익현(崔益鉉)이 흑산도로 귀양을 가자 이를 통탄, 귀향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척사 의식(斥邪意識)이 더욱 강해져 1881년의 신사척사운동(辛巳斥邪運動)에 앞장서게 된다.
1880년 일본에서 돌아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이 황준헌(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고종에게 올려 이에 대한 찬반론이 대두하게 되었다. 당시 조정은 개화정책을 강화, 추진하기 위해 『조선책략』 복사본을 전국의 유생에게 배포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개화 태도에 대해 수구파(守舊派) 정객과 전국의 유생들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신사척왜상소(辛巳斥倭上疏)의 첫 포문은 1881년 2월 이만손(李晩孫)을 소두로 하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였다.
이 상소의 소두 이만손과 제소자 강진규(姜晉奎)가 귀양을 가자, 같은 해 3월 황재현(黃載顯)·홍시중(洪時中)이 반대 소를 올렸다.
5월에는 경상 유생 김진순(金鎭淳), 경기 유생 유기영(柳機永), 충청 유생 한홍렬(韓洪烈)이 상소했고, 윤7월에는 경기 유생 신섭(申㰔), 충청 유생 조계하(趙啓夏), 전라 유생 고정주(高定柱), 강원 유생 홍재학의 상소 등 신사척왜소가 연달아 올려졌다.
그 가운데에서도 홍재학의 상소문이 가장 과격하였다. 홍재학은 상소문에서 당시 개화정책에 앞장섰던 김홍집·이유원(李裕元)에 대한 규탄뿐만 아니라 국왕까지도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즉, 국왕이 국정을 보살핀 이래 위정척사(衛正斥邪)에 대한 태도가 애매했을 뿐만 아니라 사학의 무리를 방치한 실정을 지적하고, 나아가 척사윤음을 반포한 이후의 태도가 구태의연한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 극언하고 그 기만함을 비판하였다.
홍재학은 또 개국 이래 국내에 보급된 『중서문견(中西聞見)』·『태서문견(泰西聞見)』·『만국공법(萬國公法)』 등을 사악한 책으로 규정하였다.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신기한 것을 숭상하는 무리들이 견문을 넓히고 흉금을 여는 신서(新書)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육예육과(六藝六科), 즉 공자·맹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그 요사함을 규탄하였다.
결국 홍재학은 이 상소로 위정자들의 격분을 사서 참형을 당하였다. 이 상소는 한말의 정통적인 위정척사사상과 애국정신, 우국충정이 가득한 내용으로, 신사척사운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