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부인은 태조의 딸 숙신옹주(淑愼翁主)이다.
1417년(태종 17) 대호군(大護軍)으로 당성군(唐城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의용위(義勇衛)가 설치되자 절제사(節制使)가 되었다.
세종이 즉위하자 내금위삼번절제사가 되고, 1421년(세종 3) 우사금절제사(右司禁節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벌레가 제릉(齊陵)의 솔잎을 먹으므로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의 인력을 동원하여 이를 잡고 소나무를 심었다.
1427년 가정대부(嘉靖大夫) 당성군에 봉해지고, 1434년 평양에 가서 사신을 위로하여 보냈다. 1435년 제릉(齊陵)의 헌관(獻官)으로서 돌아 오다가 벽제역(碧蹄驛)에서 불쌍한 어린애를 주워 와서 역리(驛吏)로 하여금 보호해 기르게 하고 뒤에 제생원(濟生院)에서 기르게 하였다.
이듬해 종묘에 기우제를 지낸 뒤 비가 내리자 내구마(內廐馬) 1필이 하사되었다. 1446년 숭덕대부(崇德大夫)가 되고, 1448년 충청도도절제사(忠淸道都節制使)가 되었다. 이듬해 숭덕대부(崇德大夫)가 되고, 1450년(문종 즉위) 황주(黃州)에 가서 사신을 선위(宣慰)하였다.
1452년 여름 향사(享祀)에 영녕전(永寧殿)의 헌관(獻官)으로 말 1필이 하사되었다. 1455년(단종 3) 금성대군과 같은 파라는 이유로 수양대군파에 의해 파직당하였다.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서 지위가 호반(虎班)에 올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