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성재(聖在), 호는 노정(鷺汀). 황이징(黃爾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휘(黃暉)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황처신(黃處信)이며, 어머니는 이민징(李敏徵)의 딸이다.
1710년(숙종 36) 진사가 되고, 그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14년 설서 · 사서 등을 거쳐 이듬 해 지평이 되었다. 1716년에는 정언이 되었으며, 다음 해 전라도 · 경상도 등 삼남지방의 백성들이 굶주리는 이유를 들어 그 지역 토지를 다시 측량하는 경계행정(經界行政)을 연기해 줄 것을 진언하였다.
또한 1718년 의금부의 나졸이 죄인을 잡으러 광주(廣州)를 지나가다가 말을 훔치려 한 혐의로 중군 정습(鄭習)에게 곤장을 맞은 사건을 엄정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이듬 해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가면서는, 왜인들에게 수색을 당하는 일이 있으니 사행(使行)이 돌아올 때 흔히 사들여오던 흑각(黑角: 검은빛의 물소뿔)을 절대로 사들여오지 말라는 엄명을 내리도록 건의하였다. 또한 왜와의 교섭은 신중히 해야 함을 아뢰었다.
1721년(경종 1) 승지가 된 뒤, 김일경(金一鏡)과의 관련을 소로 변론하였다. 그러나 노론4대신과 함께 박필몽(朴弼夢)에게 탄핵을 받아 무장(茂長)으로 유배되었다가 1723년 양덕(陽德)으로 이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복직되었고, 이듬 해에 승지 · 형조참판 등을 거쳐, 1727년 1월 대사간이 되었다. 이 때 좌천된 서종급(徐宗伋)을 옹호하는 소를 올렸고, 다시 수어청(守禦廳)의 재령 지방 토지 관리 문제에 관해 상소하였다.
1727년 5월 경상감사가 되어 백지징세(白地徵稅)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한편, 함안군수 이광형(李光炯)의 양민장살사건으로 상사로서 연대책임을 물어 추고를 당하였다.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거창 지방을 뒤흔든 정희량(鄭希亮)의 난을 평정하였다.
1728년 4월 황선이 경상감영에서 갑자기 죽었다. 사인을 조사했으나 끝내 밝혀내지 못하였다. 5월에는 도승지 박사수(朴師洙)에 의해 상훈 주청이 있었고, 1733년 지사 김재로(金在魯)에 의해 공로 포상이 거론되었다. 또한 평안감사 박사수에 의해 다시 포상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788년(정조 12)에 가서야 실현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