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友松堂). 황희(黃喜)의 4대손이며, 호조판서 황치신(黃致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사경(黃事敬)이고, 아버지는 현령 황징(黃懲)이며, 어머니는 한경서(韓慶瑞)의 딸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61년(명종 16) 진사로서 식년 문과에 급제, 1563년 정언을 거쳐 1567년 지평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583년 황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1590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선임되어 부사 김성일(金誠一), 서장관(書狀官) 허성(許筬)과 함께 수행원 등 200여명을 거느리고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로 가서 일본의 관백(關伯) 도요토미(豊臣秀吉) 등을 만나보고 이듬해 봄에 환국하여, 국정을 자세히 보고하였다.
서인에 속한 그가 일본의 내침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강구하였으나, 동인에 속한 김성일이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것없고 군사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엇갈린 주장을 하여 일본방비책에 통일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이 당시 그의 말을 좇지 않은 것을 크게 후회했다. 한편, 그는 일본에서 돌아올 때 대마도에서 조총(鳥銃) 두 자루를 얻어가지고 돌아와 바쳤지만, 조정에서 그것을 실용화할 계획을 하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