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비이며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묘이다. 원래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 산 5번지 경희의료원 자리에 위치했으나, 1969년 10월 25일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의 서삼릉(西三陵) 경내로 이장되었다.
윤씨는 1479년 폐출당했으며, 1482년(성종 13) 8월에 사약을 받았다. 이 때 성종은 예조에 교지를 내려 폐비 윤씨의 묘소를 ‘윤씨지묘(尹氏之墓)’라 표시하고, 묘지기 2인을 배치, 소재지 관원에게 민속적인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며 영구히 고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1494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1496년 효사묘(孝思廟)라는 사묘(私廟)를 짓고, 윤씨의 묘를 수봉해 회묘(懷墓)라 하였다.
그 뒤 1504년 갑자사화를 겪고 난 뒤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고 회묘를 회릉으로, 효사묘를 혜안전(惠安殿)으로 승격시켰으며, 모든 석물(石物)을 왕릉의 형식과 같이 하는 한편 제향 절차도 종묘 의식과 같게 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회릉은 회묘로 강봉되고, 혜안전도 철폐되어 윤씨의 신주(神主)는 묘 곁에 묻혔다. 석물은 봉분과 함께 그대로 남아 있다가 서삼릉 내 귀인(貴人)·숙의 묘역 바로 뒤로 이장되었다.
이장된 회묘는 곡장이 불타 기단부만 남았다. 봉분을 두른 난간석도 일부 무너졌으나, 문인석·무인석 등 다른 석물과 함께 조선 초기 왕릉의 석물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