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도는 백성들에게 효행을 장려하기 위하여 효행고사를 그림으로 묘사한 고사인물화이다. 효 이념을 보급하기 위한 교화·감계용 그림이다. 판화로 제작된 행실도류는 백성들에게 유교적 소양을 교육하려는 효행고사 인물화이다. 첩·책에 수묵채색으로 묘사된 것은 왕실 감상용이다. 병풍으로 제작된 것은 왕실과 일반 사대부 자제를 위한 고사인물화이다. 조선 후기 민화의 유행과 더불어 민간에서도 효자도가 그려졌다. 이외에도 가구의 장식문양 등에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효자도는 효 이념 확산과 정착은 물론 고사인물화의 다양한 화풍을 보여준다.
효자도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속삼강행실도(續三綱行實圖)』,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 등에 포함되었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의 효행고사를 그린 행실도류 효자도가 조선시대에 꾸준히 간행되었다. 주로 판화(版畵)로 제작된 행실도류 효자도는 유교의 근본이념인 효를 권장하고, 이러한 유교적 소양을 백성들에게 교육시키고자 왕실이 중심이 되어 출판되었다.
한편, 효자도는 첩(帖) · 책(冊)에 수묵채색으로 묘사된 것이 있는데, 왕실 감상용으로 추정되는 『만고기관첩(萬古奇觀帖)』(약 1720년경)에 「자로부미(子路負米)」, 「맹종읍죽(孟宗泣竹)」 등이 들어있다.
병풍(屛風)으로 제작된 효자도는 왕실과 일반 사대부의 자제를 위한 것으로 보이는 정교하고 화려한 색채의 것과 일반 서민들이 소비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민화 효자도병풍이 있다. 8폭 또는 10폭 병풍에 그리며, 그림의 내용은 「왕상부빙(王祥剖氷)」과 「맹종읍죽(孟宗泣竹)」, 「황향선침(黃香扇枕)」 등의 이야기가 묘사되었다.
조선후기 민화의 유행과 더불어 민간에서도 효자도가 제작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에 보이는 ‘효’자도(‘孝’字圖)이다. 이외에도 효자도는 편화(片畵), 가구의 장식문양 등에 다양한 형태로 제작 · 유포되었다.
효자도는 중국 한(漢)대 화상석에서 확인되며, 당(唐)대 이후 『24효도(二十四孝圖)』 도상이 성립되었다. 우리나라는 『효행록(孝行錄)』(1346년)에 24효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어 그림의 형태는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부터 효자도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조선 초기 서거정이 효자도 병풍을 보고 쓴 「효자도십영(孝子圖十詠)」이 있어서 삼강행실도 제작 이전에도 효자도가 제작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행실도류 효자도는 판화로 제작하였고 당시의 화풍을 반영하고 있다. 행실도류 판화는 주로 한 화면에 하나의 일화를 여러 장면으로 도해(圖解)하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1797년(정조 21)에 제작된 『오륜행실도』의 효자도는 한 화면에 한 장면을 표현하였다. 『오륜행실도』의 화풍과 기법은 민화 효자도인 병풍과 편화, 문자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효자도는 조선시대 국가이념으로서의 효를 알기 쉽게 도해하여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제작되었고, 유교사회로 안착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그려져 조선후기 이후에는 기층문화에까지 뿌리내렸다. 또한 효자도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고사인물화의 다양한 화풍과 양식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효자도에는 고사와 찬(讚) · 시(詩)가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각 시기별 한문과 한글의 변천사를 알아보는 데도 유용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