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패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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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패총 출토 유물
흑산도패총 출토 유물
선사문화
유적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즐문토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
정의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석기시대 신석기의 즐문토기 등이 출토된 조개더미.
개설

신석기시대 후·말기에 형성된 서남해 도서지역의 전형적인 조개더미이다. 2차에 걸쳐 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유적의 입지 환경과 출토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어패류 등 해양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생활공간으로 추정된다. 층위는 3개 층으로 구성되며, 퇴적층에서는 이중구연토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양이 시문된 즐문토기와 마제석부(磨製石斧), 타제석부(打製石斧), 고석(敲石: 공이), 지석(砥石: 숫돌), 흑요석 박편 등이 출토되었다.

내용

흑산도 진리만의 남안에 위치하며, 조개더미는 동측으로 뻗은 대봉산과 연결되는 접속 부분의 만오부(灣奧部) 북측 경사면의 사구 상에 입지한다. 현 해안선과는 3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유적 주변에는 민가가 들어서 있다. 1954년 국립박물관에 의해 처음으로 조사된 이후 1967년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남해 도서지역 고고학적 조사에서 간단한 시굴이 이루어 졌다. 이후 목포대학교 사학과에서 여러 차례 지표조사가 실시되었다.

1차 조사에서는 주로 굴 껍질로 이루어진 15~30㎝ 두께의 순패층이 확인되었으며, 여기서 골각기 2점과 즐문토기(櫛文土器) 편 80점이 출토되었다. 즐문토기 중 유문토기는 10편 정도인데, 문양은 구연 하에 연속적으로 침선을 조잡하게 시문한 것과 끝이 약간 넓은 시문구로 연속적으로 눌러 시문한 선열문(線列文) 형태가 있다. 기형은 불확실하지만, 완(盌)형, 유경호(有頸壺), 발형으로 추정된다.

2차 조사는 좀 더 넓은 범위에 걸쳐 시굴이 이루어졌으며 층위는 크게 3개 층으로 구분된다. 1층은 깊이 40~100㎝ 정도의 교란층이며, 2층은 20~60㎝ 정도의 모래가 섞인 역석층이다. 2층 아래에는 패각으로 구성된 렌즈상의 간층이 부분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3층은 갈색모래층으로 두께는 24~36㎝ 정도이다. 3층 아래에는 흑갈색사층과 황사층이 퇴적되어 있으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다. 교란층을 제외한 2층과 3층에서 즐문토기를 비롯하여 석기와 골각기 등이 출토되었으며,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즐문토기는 형식적인 특징으로 보아 남해안지역의 신석기시대 후·말기의 봉계리식과 율리식토기가 대부분이지만 특히 말기의 겹아가리토기가 주류를 이룬다. 태토는 구성 물질의 종류에 따라 점토질, 사질, 활석혼입토기로 구분되며, 활석혼입 토기는 재지계토기가 아니고 내륙지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형은 저부가 원저 내지 첨저의 심발형토기이며 이중에는 기면을 패각으로 정면한 것도 있다. 기면에는 다양한 형태의 문양이 시문되어 있지만, 무늬가 없는 것이 많다. 문양의 종류는 이중구연(二重口緣), 이중구연 단사선문, 패각선문(貝殼線文), 세격자문, 자돌점열문(刺突点列文), 압인단사선문(押引短斜線文), 다치구(多齒具)로 압날(押捺)한 유충문(幼蟲文) 등이 있다. 이중에서 유충문, 세격자문, 점열문 등은 신석기 후기에, 이중구연 및 단사선문토기는 말기에 속하는 형식이다.

석기는 자갈돌로 만든 찍개, 긁개, 박편석기, 마제석부, 타제석부, 고석, 숫돌, 원반형석기, 흑요석 박편 등이 있다. 석부는 6~11㎝ 정도의 크기이며,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특히 편암, 편마암제 석부는 흑산도에서 산출되지 않은 석재로 만든 것으로 국내의 내륙지역과 교류 혹은 교역활동을 통해 입수한 것으로 보인다. 흑요석제 박편은 산지를 확인할 수 없으나 남해안지역에서 출토되는 흑요석제 석기와 마찬가지로 일본 규슈[九州]산으로 추정된다. 이밖에 강치뼈와 대합, 바지락, 굴, 고둥, 소라, 우렁, 전복 등의 패류도 출토되었다. 시굴조사 출토품은 아니지만 목포대학교의 지표조사에서 채집한 방추차도 있다.

유적의 형성 시기와 존속 기간은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분명하지 않으나 패층에서 압인단사선문토기 등 영선동식토기에 속하는 것이 일부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상한 연대는 신석기시대 전기(서기전 4,000~3,500년)까지 올라 갈 것으로 예상되지만, 중심 시기는 후·말기(서기전 2,500년~ 2,000년)이다. 유적의 성격은 해안 지역에 거주했던 신석기인의 해양자원을 획득하기 위한 생활유적으로 볼 수 있다. 서해안지역의 원도서 중 가장 장거리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내륙지역과의 교류활동을 보여 주는 유물들은 신석기시대 해양교류 활동을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의의와 평가

광복 이후 남한지역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신석기시대 유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가거도패총과 함께 우리나라 가장 서남단에 위치하는 원도서지역의 유적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생각된다. 특히 신석기시대 해양교류와 원도서지역의 생업과 생활 양상을 이해하고 서남해안지역의 패총문화를 연구하는데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남해도서고고학』 (김원룡 · 임효재, 동아문화연구소, 1968)
『한국서해도서』 (국립박물관, 1957),
「흑산도지역의 선사유적」 (최성락, 『도서문화』 6,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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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하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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