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당(中唐)으로부터 오대(五代)에 걸쳐 활동한 중국 시인 유우석(劉禹錫, 772∼842), 백거이(白居易, 772∼846), 온정균(溫庭筠, 812∼870) 등 26인과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 875∼?), 박인범(朴仁範), 최승우(崔承祐), 최광유(崔匡裕) 등 총 30인의 7언율시 각 10수(首)씩 300수를 뽑은 것이다. 당초의 이름은 『명현십초시(名賢十抄詩)』이며, 줄여서 『십초시』라 부르고, 후에 주석(注釋)을 가함으로써 『협주명현십초시(夾注名賢十抄詩)』라 한 것이다.
편찬자, 편찬시기 및 동기 등이 불확실하다. 다만 고려 말기의 시인이 편찬한 것, 혹은 시를 선발한 이는 고려시대의 큰 선비이고 주석을 낸 이는 신인종(神印宗) 늙은 승려로만 알려져 왔다. 호승희 박사는 편찬시기를 고려시대 시풍(詩風)의 전환한 것과 관련지어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이전의 고려 중기로 추정한 바 있다.
현전하는 중간(重刊) 『협주명현십초시』는 1337년(충숙왕 복위 6)에 안동부(安東府)에서 간행한 판본을 권람(權擥, 1416∼1465)이 교정하여 1452년(단종 1)에 중간한 것으로, 안동부 판본의 대본은 권사복(權思復)이 진사(進士) 시절에 베낀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1337년 이전에 이미 『십초시』가 편찬되고 협주까지 이루어진 것이다. 협주는 신인종 노승(老僧)이 경주 영묘사(靈妙寺)에 머물 때 『십초시』를 보고, 그 체격(體格)이 전아(典雅)하여 후진 학자들에게 유익할 것 같아 착수하였다고 한다.
현전하는 판본은 규장각(奎章閣) 소장 목판본(木版本) 『십초시』와 필사본(筆寫本) 『협주명현십초시』, 그리고 남권희 교수 소장 목판본 『협주명현십초시』 등이 있다. 필사본 『협주명현십초시』는 목판본의 행(行)과 글자 수까지 그대로 베낀 것으로 신인종 노승의 서문(序文) 및 권람(權擥)과 이운준(李云俊)의 발문(跋文)이 남아 있어 가장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조선시대 경상도 밀양부에서 간행한 지방관판본 『협주명현십초시』가 2017년 1월 2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중당∼오대 연간으로 시대를 한정한 것은 최치원 등 신라 말 견당유학생(遣唐遊學生)을 작가와 시대 선택의 중심에 놓은 것이며, 각 10수씩 뽑은 것은 우리나라의 시인들이 중국 시인과 대등하다는 편찬자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300수를 뽑은 것은 『시경(詩經)』의 300수와 관련이 있다. 즉 그 정신과 맥을 잇고자 한 것이다. 7언율시만 뽑은 것은, 권람이 발문에서 조선 초기에 진사과(進士科)를 설치하여 시부(詩賦)를 시험하므로 시를 배우는 이는 『십초시』를 알아야 할 것이라고 한 바, 과거시험에 대비한 시문 학습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협주는 각 작가에 대하여 약전(略傳)을 마련하여 자(字), 호(號), 과거(科擧), 문집(文集), 벼슬 등을 간략히 기술해 놓았으며, 시 제목의 경우 저작배경이나 인명, 지명, 건물 등과 관련한 고사(故事)를 밝히고, 시구(詩句)에도 전거(典據)를 부기해 놓아 시를 이해하는 데 요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