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암(西庵, 1914~2003)의 속성은 송(宋), 본명은 홍근(鴻根)이고, 법명도 본명과 같은 홍근(鴻根)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출신이다. 서암은 부친 송동식(宋東植)과 모친 신동경(申東卿) 사이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서암은 어린 시절 동네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한학(漢學)과 신학문(新學問)을 배웠다. 1928년에는 경상북도 예천 서악사 화산(華山)의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932년 그가 19세 때, 김룡사에서 낙순 화상을 계사(戒師)로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이후 서암은 김룡사 강원에서 수학하였으며, 1935년 김룡사에서 금오(金烏)로부터 비구계(比丘戒)와 보살계를 받았다. 1938년 강원을 졸업한 그는 유학을 떠나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学] 종교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40년 폐결핵 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3학년을 끝으로 중퇴하여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서암은 1년 동안 대창학원에서 학생을 지도하였고, 1941년에는 김룡사 선원에서 참선 정진하였다. 이듬해 봄부터 1년 동안 그는 강원도 철원 심원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1944년 여름에는 금강산의 마하연과 신계사에서 정진하며 병마를 물리쳤다. 이해 가을 서암은 묘향산과 백두산을 거쳐 문경 대승사의 바위굴에서 승려 성철(性徹)과 함께 정진하였다.
광복이 된 1945년 서암은 예천 포교당에서 불교청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46년에는 계룡산의 나한굴(羅漢窟)이라는 천연동굴에서 용맹정진하여 본무생사(本無生死)를 깨달았다. 계룡산에서 내려온 뒤에도 그는 만공(滿空)의 회상인 정혜사와 한암(漢岩)의 회상인 상원사 그리고 해인사, 망월사, 속리산 복천암, 계룡산 정진굴, 대승사 묘적암 등지에서 정진을 계속하였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서암은 금오 화상과의 인연으로 지리산 칠불암, 광양 상백운암, 보길도 남은암, 계룡산 사자암 등지에서 정진하였다. 특히 칠불암에서는 공부하다 죽을 각오로 수행에 임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남아 있다.
서암은 6 · 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부터는 비어 있던 문경 원적사(圓寂寺)로 가서 수행을 하였다. 서암이 원적사에서 정진한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수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기도 했다. 이후 그는 범어사, 동화사, 함창 포교당, 태백산 홍제암, 각화사 동암, 상주 청계산 토굴, 나주 다보사, 백양사, 지리산 묘향대, 천축사 무문관, 통도사 극락암, 제주 천황사, 김룡사 금선대, 상주 갑장사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정진 · 수행하였다.
서암은 1970년 봉암사 조실(祖室)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사양하였고, 1975년에는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았으나 2개월 만에 사퇴하였다. 1978년에는 봉암사 조실이 되어 승풍을 바로잡고 가람을 중창하였으며, 일반인에게는 산문을 통제하여 사찰의 수행 환경을 정화하였다. 그는 평생을 수행하고 정진하던 중 때때로 직책을 맡기도 하였지만 종단의 급한 문제가 해결되면 미련 없이 떠나 다시 수행에 매진하였다.
1991년 성철 종정(宗正)이 퇴임하게 되자, 종정 선출을 원로 회의(元老會議)가 하느냐 종회에서 결정한 추대 위원회가 하느냐를 두고 조계종 내부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이때 서암은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어 해인사 승려 대표자 대회를 주도하였으며, 종단의 개혁을 이끌었다. 1993년 12월에 서암은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하지만 이때에도 종권 다툼의 소용돌이가 계속되어 그는 임기를 반년도 채우지 못하고 종정직을 내려 놓게 되었다. 이후 그는 봉암사 조실도 사임하고 종단을 아예 떠나 거제도,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 태백산 자락에 가건물을 지어 무위정사(無爲精舍)라 이름하고 무위자적하였다.
2001년에 서암은 봉암사 대중들의 간청에 의하여 봉암사의 염화실로 돌아왔다. 그후 2003년 3월 29일 염화실에서 입적하였다. 이때 서암은 세수 87세, 법랍(法臘) 7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