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며 정무를 보던 곳으로, 강원감영은 1395년(태조 4) 처음 설치된 후 1895년(고종 32) 조선 8도제가 23부제로 될 때까지 500년 동안 유지되었다. 지금 옛 건물로는 문루와 선화당, 청운당만이 남아 있으며, 2000년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터와 연못터 등을 찾아냈다. 원주 강원감영지는 면적 약 9,608.6㎡로, 2002년 3월 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감영지 내에 있는 포정루(布政樓)는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 선화당은 2021년 보물로 각각 지정되었다.
강원감영 건물은 임진왜란 당시 모두 불타 버렸던 것을 1634년(인조 12) 당시의 목사 이배원(李培元)이 다시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이중길(李重吉) 목사가 완성하였다. 그 후 1665년(현종 6) 감사 이만영(李晩榮)이 선화당과 삼문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667년 감사 이후산(李後山)이 완성하였다. 이후 관청 건물로 사용해 오다가 1950년 6 · 25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무너지고 담장이 허물어졌으며, 관풍각이 있던 큰 연못도 메워지게 되었다. 원주시와 원성군의 통합 전까지 한때 원주군청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강원감영의 관아는 1795년(영조 35)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총 27동에 505칸의 건물이 있었으며, 1830년(순조 30) 편찬된 『관동지(關東誌)』 강원감영도(江原監營圖)에는 41동의 건물이 나와 있는데, 원주목의 관아인 본관 · 별창 · 사창 · 추월대 등을 제외하면 강원감영의 건물은 37동이다. 그 후 고종 때 관찰사 윤병정이 1874년부터 1875년 사이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는데, 당시 건물은 모두 43동에 495칸이었다.
문루(門樓)는 방형의 긴 초석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익공 양식에 팔작지붕 겹처마 건물이다. 문루에는 우물마루를 깔고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궁창판에는 장식이 없고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선화당(宣化堂)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문루와 함께 재건하였는데, 동헌 등 부속 건물이 있었다.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집으로 정면과 양 측면의 각 1칸씩은 툇간으로 처리하였다. 중앙부는 바닥을 올려 마루 널을 깔고, 왼쪽 3칸은 개방되어 있으나 오른쪽 2칸은 띠살창을 달아 방으로 구획하고 있다. 이익공 양식에 2고주 7량집이고,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에는 사면에 기둥들을 세워 1칸의 툇간을 두었고, 기둥 옆에는 세살문을 달았으나 후대에 변형이 있었다. 바닥은 모두 우물마루를 짰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발굴 과정에 드러난 기단으로 인해 옛 관청의 위용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선화당 옆에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민도리 계통의 ‘ㄱ’자형 목조 기와집인 청운당이 있으나 후대에 옮겨 지은 건물이다.
옛 건물들이 아직 남아 있고 건물터가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감영의 건축 형태를 알려주고 있다. 우리나라 관아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