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낫

선사문화
물품
철기시대 이후 농기구나 무기로 사용된 철로 만든 낫.
이칭
이칭
철겸(鐵鎌)
물품
재질
용도
농기구|무기
제작 시기
철기시대~삼국시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쇠낫은 철기시대 이후 농기구나 무기로 사용된 철로 만든 낫이다. 거푸집에 주물을 넣어 주조하거나 철판을 두드려 단조한 것으로 구분한다. 외형은 자루에서 직선 또는 곡선을 띠며, 둥근 날 부분의 형상을 띤다. 날 부분은 둥글게 날을 세워 풀이나 곡식, 나뭇가지 등을 자르는 데 사용되는 농기구이다. 시대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며 무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정의
철기시대 이후 농기구나 무기로 사용된 철로 만든 낫.
주조제 쇠낫의 등장

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진 쇠낫은 주물을 거푸집에 부어 만든 주조 쇠낫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영변 세죽리유적, 완주 갈동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완주 갈동유적의 주조 쇠낫은 무덤 내 부장된 것으로 2 · 3호묘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완주 갈동유적에 부장된 두 쇠낫은 서기전 3세기 대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확인되는 쇠낫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어 전국계로 보인다.

갈동유적의 주조 쇠낫과 비교할 수 있는 요령 지역의 주조 쇠낫은 실제 사용되고 재활용이 되는 반면, 갈동유적 주조 쇠낫은 사용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한반도 내에서 출토된 주조 쇠낫은 아직 그 수가 많지 않아 전국계 물질 문화의 일시적인 유입으로 추정된다.

단조제 쇠낫의 성행

쇠낫의 대다수는 두드려서 만든 단조품이다. 단조 쇠낫은 서기전 1세기 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단조 쇠낫의 형태는 자루와 연결되는 기부에서 직선에 가깝게 이어져 둥글거나 뾰족한 선단부로 이어진다. 기부의 끝부분을 짧게 ‘ㄱ 자’ 모양으로 돌출시켜 자루에 끼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내만된 안쪽 면은 날을 세우고, 돌출된 ‘ㄱ 자’ 모양으로 기부의 자루에 끼운 후 쐐기 등을 집어 넣어서 낫과 자루를 고정하였다. 삼한의 대구 팔달동유적 등의 금호강 유역에서 출토된 예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후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 고분과 생활유적에서 형태와 크기를 달리하며 출토된다.

쇠낫의 변화와 소유 방식

쇠낫의 형태는 크기가 대형에서 소형으로 작아지며, 등 부분의 형태는 직선에서 곡선으로 심하게 꺾이는 모습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낫과 자루의 결합 각도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다른데, 철기시대의 쇠낫은 둔각, 삼국시대의 쇠낫은 직각에 가깝게 결합된다. 또한 철기시대 무덤 내 부장된 쇠낫은 비율이 낮지만,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무덤의 규모를 가리지 않고 쇠낫이 부장되는 경향을 띤다.

삼국시대가 되면 무덤마다 쇠낫이 1점 이상씩 부장되는데, 이를 통해 쇠낫의 소유가 일상화되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쇠낫의 소유 형태 변화는 당시 농경의 확대에 따른 농기구의 소유 문제, 생산물에 대한 수취 체계가 마을 단위에서 개인으로 점차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무기로도 사용된 쇠낫

환인오녀산성 철기 저장고에서 출토된 3점의 대형 쇠낫은 전장이 30㎝ 정도로 긴 편이다. 또한 부여부소산성에도 50㎝가 넘는 대형 쇠낫이 출토된다. 따라서 산성 등에서 출토된 대형 쇠낫의 경우 성벽을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적을 물리치기 위한 수성용 무기로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말 탄 적을 걸어 당기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낫과 같은 형태의 무기 형상이 확인된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 최소 단위 부대에 지급된 보조 병기의 하나로 쇠낫이 추가적으로 활용되었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완주갈동유적』(호남문화재연구원, 2005)
『완주갈동유적Ⅱ』(호남문화재연구원, 2005)

논문

김상민, 「동북아시아 철겸의 변천과 완주 갈동유적 주조철겸의 등장배경」(『야외고고학』 34, 한국문화유산협회, 2019)
김성태, 「최근 보고된 고구려무기의 검토」(『고구려발해연구』 20, 고구려발해학회, 2005)
안승모, 「고대의 농구」(『한국농기구도감』, 한국농업기계학회, 2001)
홍보식, 「고분문화를 통해 본 6∼7세기대의 사회변화-영남지역을 중심으로-」(『한국고대사논총』 7,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5)
서영남, 「철겸에 대하여」(『동래복천동고분군Ⅱ』, 부산대학교박물관,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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