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처음 만들어진 쇠낫은 주물을 거푸집에 부어 만든 주조 쇠낫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영변 세죽리유적, 완주 갈동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완주 갈동유적의 주조 쇠낫은 무덤 내 부장된 것으로 2 · 3호묘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다. 완주 갈동유적에 부장된 두 쇠낫은 서기전 3세기 대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확인되는 쇠낫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어 전국계로 보인다.
갈동유적의 주조 쇠낫과 비교할 수 있는 요령 지역의 주조 쇠낫은 실제 사용되고 재활용이 되는 반면, 갈동유적 주조 쇠낫은 사용 흔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한반도 내에서 출토된 주조 쇠낫은 아직 그 수가 많지 않아 전국계 물질 문화의 일시적인 유입으로 추정된다.
쇠낫의 대다수는 두드려서 만든 단조품이다. 단조 쇠낫은 서기전 1세기 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단조 쇠낫의 형태는 자루와 연결되는 기부에서 직선에 가깝게 이어져 둥글거나 뾰족한 선단부로 이어진다. 기부의 끝부분을 짧게 ‘ㄱ 자’ 모양으로 돌출시켜 자루에 끼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내만된 안쪽 면은 날을 세우고, 돌출된 ‘ㄱ 자’ 모양으로 기부의 자루에 끼운 후 쐐기 등을 집어 넣어서 낫과 자루를 고정하였다. 삼한의 대구 팔달동유적 등의 금호강 유역에서 출토된 예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후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 고분과 생활유적에서 형태와 크기를 달리하며 출토된다.
쇠낫의 형태는 크기가 대형에서 소형으로 작아지며, 등 부분의 형태는 직선에서 곡선으로 심하게 꺾이는 모습으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 낫과 자루의 결합 각도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다른데, 철기시대의 쇠낫은 둔각, 삼국시대의 쇠낫은 직각에 가깝게 결합된다. 또한 철기시대 무덤 내 부장된 쇠낫은 비율이 낮지만,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무덤의 규모를 가리지 않고 쇠낫이 부장되는 경향을 띤다.
삼국시대가 되면 무덤마다 쇠낫이 1점 이상씩 부장되는데, 이를 통해 쇠낫의 소유가 일상화되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쇠낫의 소유 형태 변화는 당시 농경의 확대에 따른 농기구의 소유 문제, 생산물에 대한 수취 체계가 마을 단위에서 개인으로 점차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