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하는 사람이나 물건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만든 인공수로이다. 원래는 선박 항행 이외에 관개·급수·배수 등의 목적으로 축조된 인공수로를 총칭한다. 통상적으로는 수운을 하기 위한 인공수로를 말한다. 운하의 종류는 하측 운하 및 연하·연양 운하, 공업 운하, 도시 운하 등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134년에 처음 가적 운하의 개착 공사가 있었다. 이후 몇 번의 운하 건설 시도가 있었지만 운하를 완성하지 못했다. 1987년에 인천에서 한강을 잇는 경인아래뱃길 건설 계획이 확정되었다. 이 사업은 우리나라 최초의 뱃길 조성 사업이다.
운하는 원래 선박 항행(航行) 이외에 관개 · 급수 · 배수 등의 목적으로 축조된 인공수로를 총칭하지만, 통상적으로 수운을 하기 위한 인공수로를 말한다. 수로는 하천을 비롯하여 호소(湖沼)나 해만(海灣)까지도 포함한다. 때문에 준설(浚渫), 갑문(閘門), 언제(堰堤) 등의 공사를 시행하고 있는 하천이나 내만(內灣) 역시 하천운하 · 운하화 하천 및 운하화 해만이라고 부른다.
운하의 종류는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의 마시(Mersey) 강변에 분포하는 하측(河側) 운하, 연하(連河) 운하로 독일의 라인 강과 엘베 강을 잇는 동서 횡단의 미텔란트(Mittelland) 운하, 지협(地峽) 운하로 독일의 킬(Kiel) 운하, 연양(連洋) 운하로 수에즈(Suez), 파나마(Panama) 운하가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보면 대선(大船) 운하와 거룻배 운하로 구분된다. 매립 임해공업지역에는 일반적으로 공업 운하, 도시 운하, 시가지 운하, 항양선(航洋船) 운하, 내륙운하가 있다. 그밖에 두 나라 이상에서 조약에 의해 운영되는 국제운하는 국제하천과 같이 국제법상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다.
운하는 모두 가항운하(可航運河)가 아니다. 옛날에는 오히려 방수(放水) · 급수(給水)운하나 관개용수로였다. 운하도 항만과 같이 경제발전이나 기술의 진보와 더불어 시공 방식이나 기능적인 면에서 크게 변천하였다. 역사상으로 주요 운하는 서기전 700년에 개착(開鑿)하고 그 후에 소멸되었다는 바빌론(Babylon) 대운하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코린트(Corinth) 운하, 그리고 중국의 대운하 등이 있다.
유럽의 운하는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이후 17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는 하천의 유로에 갑문을 설치하는 등 인공적인 개량을 하였으며, 적절한 수심을 확보하고 유속을 제어함에 따라 하항을 부분적으로 연장하는 공사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만든 최초의 운하는 1761년에 개통한 영국의 워슬리(Worsley) 운하로, 이 운하는 워슬리 탄광에서 맨체스터까지 약 16㎞의 길이를 연결하였다.
그 후 1767년에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의 브리지워터(Bridgewater) 운하가 최초의 근대적인 운하로 완성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운하가 개통되어 1789년1797년 사이를 ‘운하 열광(canal mania)’이라고 불릴 정도였다.이러한 운하 건설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산업혁명으로 급증한 수송수요에 대응한 것이었다. 종래 마차 교통 비용을 1/41/3로 절감하여 당시 영국의 공업입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에서는 운하의 폭, 깊이, 갑문의 형식 등이 같지 않아 다른 운하를 연결하는 직통 운항이 어려웠고 느린 속도 역시 철도와의 경쟁에서 뒤떨어진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
한편 미국은 1825년에 이리 운하(Erie Canal)가 개통된 이후, 동부지방에서는 1817년~1837년 경에 ‘운하시대’를 맞이하였고, 뒤이어 중서부지방 역시 ‘운하시대’를 맞이하였다. 운하 등의 내륙수로는 철도가 출현한 이후에 급속히 쇠퇴했지만, 영국과 같이 소규모의 운하가 많은 지역에 해당되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큰 하천을 이용한 내륙수로는 철도의 등장 이후에도 무게가 무겁고 부피가 큰 화물을 수송하는데에 큰 역할을 했고, 오히려 기선의 등장이 하천 이용을 더욱 촉진시켰다. 슈피리어 호(Lake Superior)와 휴런 호(Lake Huron)를 연결하는 수세인트 마리(Sault Sainte Marie) 운하는 선박 통행량으로 수에즈 운하와 필적할만하다.
우리나라는 운하가 없었지만 가적(加積) 운하의 개착(開鑿) 공사가 이루어졌다. 원래 태안지방의 근흥면 안흥량(安興梁)은 삼남지방의 세곡미(稅穀米)를 조운(漕運) 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조류가 빠르고 풍랑과 조석간만의 차가 심해 해난사고가 잦았다. 이곳의 해난사고는 인명과 세미(稅米)의 손실은 물론, 조역(漕役)의 기피현상, 새로운 조운선 제조에 따른 국민부담의 증가, 세미손실에 따른 환징(換徵) 등의 피해였다. 이 때문에 운하를 건설하기 위한 시도가 몇 번 이루어졌다.
가적운하의 개착공사는 1134년(고려, 인종 12)에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운하가 완성되지 못하여 1391년(공양왕 3)에 제2차 운하건설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화강암층의 지질을 뚫지 못하였고, 조석간만의 차를 극복하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조선 세조 때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고자 하였으나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또 다시 중단되었다.
이곳의 운하 건설은 태안반도의 가로림만(加露林灣)과 적돌만(積乭灣) 사이에 있는 3㎞의 지협을 운하로 바꾸는 공사로, 시간거리를 단축시켰다. 가적운하가 건설된 자리에는 평균 표고가 약 10m이고, 너비가 약 30m이며, 깊이가 10~15m 되는 개석곡(開析谷)이 형성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퇴적이 이루어져 대부분 논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굴포운하는 강화도와 김포반도의 물길이 거세어 손돌목에서 배가 뒤집히는 사고가 많아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 판 것이다. 이 공사는 처음 고려시대 때, 최이(崔怡: 최우(崔瑀))가 안남(현재 인천시 부평구 가좌동 일대)에 도랑을 파서 바다와 연결하고자 하였으나 중지되었다.조선 중종 때 김안로가 다시 운하 건설을 시도했으나 굴포천(인천시와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일대)만 건설하고 원통현(圓通峴, 현재 인천시 부평구 부평 3동) 400m의 암석층을 뚫지 못해 실패하였다.
그 후 한강 하구가 군사분계선으로 막히면서 하운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였고, 그러던 1966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가양동에서 인천광역시 서구 원창동 율도까지 총연장 21㎞, 수심 4m, 하폭 90m의 운하 건설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경인 지역의 급격한 도시화와 지역개발로 중단되었다.
1987년에 경인아라뱃길(경인운하)의 건설 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인천광역시 서구 오류동(서해)에서 서울특별시 강서구 개화동(한강)을 잇는 길이 18㎞(홍수 시 방수로 구간 14.2㎞ 포함), 폭 80m, 수심 6.3m의 주운 수로를 건설하였다. 이로 인해 선박 운항로 및 홍수 소통 기능이 원활해지고 두 개의 터미널이 건립되었다. 터미널은 인천광역시 서구 오류동과 경기도 김포시 고촌면 전호리에 두고 컨테이너, 화물적재와 하역, 보관, 휴식 공간 제공 및 여객 수송을 담당하게 되었다.
인천 터미널은 면적이 245만 3천㎡로 물류단지 116만 2천㎡와 항만 129만 1천㎡을 건설하였고, 김포 터미널은 면적이 170만 1천㎡로 물류단지 86만 9천㎡와 항만 83만 2천㎡을 건설하였다. 이로써 하천과 바다를 동시에 운항할 수 있는 250TEU의 RS선박(River/Sea)을 운항하게 되었다. 운하의 갑문은 서해 갑문과 한강 갑문이 건설되었다. 서해 갑문은 갑실수가 두 개로 문비는 슬라이딩식이며, 한강 갑문은 갑실수가 한 개로 마이터식이다. 총사업비는 2조 2458억 원이 소요되었다.
경인아라뱃길 사업은 우리 민족의 오랜 숙원사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뱃길 조성 사업이다. 이 운하는 홍수피해 방지, 친환경 물류혁신, 친수 문화공간조성, 지역경제의 활성화는 물론 지능형 첨단설비와 네트워크 기반의 최신 물류 시스템 및 녹색기술력이 결합된 유비쿼터스(Ubiquitos) 에코 워터웨이(Eco-waterway)를 실현하여 우리나라 녹색성장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