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 권68은 보물 제1013호이다. 이 문헌은 송나라 화엄학승인 정원(淨源, 10111088)이 80권본 『화엄경(華嚴經)』의 본문을 나누고, 본문 아래에 80권본 『화엄경』에 대한 징관(澄觀, 738839)의 주석서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의 해당 부분을 실은 것으로 총 120권의 주석서 중 제 68권에 해당한다.
참고로 주본(周本) 『화엄경』이라고도 하는 80권본 『화엄경』은 당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국호를 주(周)로 정했을 때 한역한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이 주본 『화엄경』은 모두 80권으로 이루어져 있어 80권본 『화엄경』 또는 『팔십화엄경』이라고도 한다. 이 『화엄경』은 418~420년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359~429)가 번역한 진본(晉本) 『화엄경(華嚴經)』에 이어 새로 번역된 것이다. 이에 대한 주석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징관의 『대방광불화엄경소』이다.
의천은 송나라 유학 시절 화엄학의 대가인 정원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의천은 혜인원에 머무는 동안 정원이 엮은 『대방광불화엄경소』 1질 120권을 정원으로부터 직접 기증받았다. 이에 의천은 귀국 전 정원으로부터 받은 『대방광불화엄경소』 전질(全帙)의 판각을 항저우(杭州)의 각수 엄명(嚴明) 등에게 주문하였다. 1087년(선종 4) 3월 송나라 선상(船商) 서전(徐戩) 등을 통해 모두 2,900여 판에 이르는 목판(木板)이 고려에 전달되었다.
1424년(세종 6) 대장경판을 달라는 일본에 끈질긴 요청에 이 목판을 대신 주어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목판들은 일본 교토 쇼코쿠사[相國寺]에 비치되었으나, 후에 화재로 전부 소실되었다. 따라서 이 목판은 불교를 통해 동양 3국이 문화적으로 교류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방광불화엄경소』 권68은 『대방광불화엄경소』 120권본 전체 목판을 14세기에 개성(開城)에서 인출(印出)한 것 중에서 권제68만을 1권 1첩(帖)의 절첩본(折帖本)으로 만든 것이다. 현재 삼룡사에 소장되어 있다.
1권 1첩의 절첩본(折帖本)이다. 판식(版式)은 테두리마다 하나의 검은 선을 돌린 상하단변(上下單邊)이고, 본문은 검은 선이 있는 오사란(烏絲欄)에 20행 15자,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되어 있다. 장(張)의 크기는 32.0㎝✕54.3㎝이며, 광고(匡高)는 23㎝이다.
절첩본의 표지는 주황색으로 채색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도토리 열매로 염색한 상지(橡紙)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앞 표지의 중앙에 금니(金泥)로 세로 형태의 제첨(題簽)을 그려 넣었고, 그 속에 역시 금니로 ‘대방광불화엄경소권제육십팔(大方廣佛華嚴經疏卷第六十八)’이란 글자를 촘촘하게 필사(筆寫)하였다. 이는 보물로 지정된 ‘120권본 『화엄경소』’의 다른 권본(卷本)과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이 판본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낙서나 독서의 흔적이 없는 깨끗한 상태이다. 이것으로 보아 책을 인출한 직후에 불복장(佛腹藏)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쇄된 상태를 보면 후쇄본(後刷本)으로 판단되며, 또한 제본 상태로 보아 고려 말기 즉 14세기 경에 간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은 줄여서 『화엄경』이라고 부른다. 『화엄경』의 중심 사상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不二]’라는 것이다. 이 경전은 화엄종(華嚴宗)의 근본 경전으로, 『법화경』과 함께 한국의 불교 사상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대방광불화엄경소』는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국에 갔을 때 정원(淨源)에게 요청하여 중국에서 판각(板刻)되었다. 1087년 경 고려에 수입된 ‘『화엄경소』 120권’ 목판(木板)은 '주화엄경판(注華嚴經板)'으로 지칭된다. 1424년(세종 6) 일본이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재조대장경의 목판을 달라고 조선에 요청하였을 때, 세종이 팔만대장경판 대신 이 주화엄경판을 일본 사신에게 주어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은 해인사에 있는 고려재조대장경판을 일본으로 가져가고 싶어 하였으나 유교 국가임에도 불교 유산을 소중히 여겼던 조선은 고려대장경판을 일본으로 유출하지 않았다.
고려시대 중국 송나라에서 판각된 주화엄경판은 고려시대에는 잘 보존되어 전래되었으며, 조선 세종 때 선린 외교(善隣外交)의 차원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이 목판은 한(韓) · 중(中) · 일(日) 삼국이 문화적으로 교류하였던 사례를 보여주며, 당시 삼국의 문화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