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송의(宋義, 초명 宋立章)와 더불어 1232년(고종 19) 강화천도(江華遷都)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1231년 몽고침입이 개시되고 같은 해 10월 말 안북부패전(安北府敗戰)으로 인해 12월 몽고와 강화(講和)가 체결되었다. 당시 최우정권은 몽고군 원수 사르타이[撒禮塔]가 요구한 지나친 공물 수량에 번민하면서 통역관 지의심(池義深)이 딸린 고려 사신단을 요동(遼東)으로 파견해 공물을 보냈다. 이때 허공재는 고려 사신단을 호위하면서 사르타이 군영으로 파견된 것으로 여겨진다. 허공재는 사르타이가 고려 측에서 바친 공물의 수량이 매우 적고 애초 약속한 대로 품목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크게 노하며, 지의심 등을 제소(帝所: 황제가 계신 곳)로 압송하고 나머지 사신들을 구금(拘禁)하자 목숨을 걸고 고려로 도망쳐왔다.
도환인(逃還人) 허공재는 송의와 더불어 장차 몽고 대군이 재침할 것이라고 최우에게 보고하였다. 강화천도를 구상하고도 재추(宰樞)와 대다수 관료의 반대에 부딛쳐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최우는 허공재 등의 몽고재침설(蒙古再侵說)을 명분으로 같은 해 6월 16일 전격적으로 강화로 천도하였다. 이후 허공재는 송의의 경우처럼 최우정권으로부터 포상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나 그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