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什一租)는 고려시대 사유지인 민전(民田)의 전조(田租) 수취에 적용되었는데, 1결(結)의 생산량을 20석(石)으로 하고 2석을 전조로 거두는 방식이다. 즉 결당 생산량의 1/10을 거두었다. 이에 반해 국유지에서의 세율(稅率)은 생산량의 1/4이었다. 십일조는 중국의 상고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맹자(孟子)에 의해 선정(善政)의 상징으로 평가된 이래 천하에 통용되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세법(稅法)으로 인식되었다.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시기는 잘 알 수 없으나, 통일 신라 때 이미 시행되었다고 알려진다. 후삼국 시기, 특히 궁예(弓裔) 치하에서는 민전 생산량의 3/10이 넘는 가혹한 수취로 인해 자영농(自營農) 계층이 몰락하였다. 이를 경험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십일조의 전면적인 시행을 천명하면서 이 제도는 고려 왕조의 기본 세법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 농장(農莊)이 크게 발달하고 수조권(收租權)을 가진 농장주들이 5/10가 넘는 가혹한 수취를 자행했을 뿐 아니라 국가 또한 이를 방치함에 따라 십일조법은 사실상 무너졌다. 이에 사전(私田) 개혁을 주도한 조준(趙浚)이 중심이 되어 농장 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의 하나로 이의 복구를 강력히 주장하였고, 이후 과전법(科田法) 규정에 반영되어 조선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 1444년(세종 26) 이른바 공법(貢法)이 제정되고 1/20세(稅)를 전제로 한 정액 세법으로서의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이 시행되면서 십일조법은 소멸되었다.
지금까지 고려의 전조에 관한 연구는 민전에서의 수조율(收租率)을 1/10조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는 연구자들이 식민 사학(植民史學)을 극복하면서 토지 사유론적 관점에서 고려의 토지 제도를 파악한 것과 관련이 깊다. 이때 일반민의 소유 토지를 민전으로 파악하고 민전의 수조율을 1/10로 파악하였다. 한편 『고려사(高麗史)』 권 78, 「식화(食貨)」1, 「조세(租稅)」 성종(成宗) 11년의 판(判)에 의하면 공전(公田)의 조(租)는 생산량의 1/4을 거두는 것으로 정해졌는데, 이는 둔전(屯田) · 공해전(公廨田)과 같은 국공유지의 수조율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근래 고려 공전조(公田租) 1/10조에 대한 반론과 함께 고려의 공전조 수조율은 1/4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군전(軍田)과 둔전의 예를 근거로 들어, 고려에서 1/10조의 시행을 부정하고 공전은 물론 사전(私田)에서도 공전에 준하는 수조율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파악한다. 고려에서 1/10조에 대한 사료는 이규보(李奎報) 이후 신진 사대부(新進士大夫)의 개혁이 이상이었을 뿐이며 실제로 시행된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이들의 이상은 과전법에서 실현되었으며, 과전에서의 수조율이 1/10조로 낮추어졌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고려와 조선왕조의 국가적 성격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며, 조선은 중세적 국가를 벗어난 국가로 이해하는 것과 관련이 깊다.
토지 사유론적 관점에서 논하였던 민전조(民田租) 1/10조와 관련한 연구에서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일반화되면서 일반 농민층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확산되는 가운데, 지나치게 고율인 공전조 1/4은 국공유지에 대한 수조율로 파악하였다. 반면 공전이자 일반 농민의 소유지인 민전은 1/10조를 징수하는 토지로 보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된 1/4 공전조의 논리는 전시과 체제와 과전법 체제의 국가적 성격을 상이한 것으로 보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즉 전시과 체제는 중세적 국가 체제이며, 과전법 체제는 그것을 극복한 단계로 보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는 전시과 체제 하 과전(科田)의 성격, 경작 농민의 존재 양태, 공사전조(公私田租)의 내용, 토지 사유권의 발전 정도 등 많은 문제에 대한 재검토 속에 재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에서 십일조는 선정의 상징일 뿐 아니라, 문란해진 세제를 바로잡는 개혁의 지표로 인식되면서 장기간 중세 사회를 대표하는 세법으로 기능하였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