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천 출신. 전주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5년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 1954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4년부산 동아대학교 토목과에 입학하였으나 군대 문제 등의 이유 때문에 1957년 중퇴하였다. 1957년 군에 입대했으나 그 다음 해 의병제대한다. 이후 작품 활동을 계속하면서 1969년 전업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까지 『교육주보』, 『대한 새교실』 등 교육 관련 잡지의 기자로 직장 생활을 하였다. 이후 소설 창작에 전념하여 많은 작품을 생산했으며, 2007년 11월 25일 작고하였다.
1957년 단편소설 「수난 이대」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후 1959년에 발표한 「흰 종이수염」이 문단을 주목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을 하게 된다.
하근찬은 민중들이 험난한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당하는 고난을 주로 다루었다. 하근찬의 문학은 역사에서 주로 소재를 취했다는 점에서 역사물이라 할 수 있고, 민중의 수난을 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민중문학이라 할 수 있다.
하근찬의 작품 가운데 「수난 이대」와 「흰 종이수염」은 일제 강점기 말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험난한 시기 경상북도 농촌 지역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수난과 그것에서 생겨난 그들의 고통과 슬픔을 밀도 있게 그린 뛰어난 수난의 문학이다. 두 작품이 오랫동안 중고등학교 국어 및 문학 교과서에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근찬 문학에 등장하는 수난당하는 민중은 고통스러워하고 깊이 슬퍼하지만 쓰러지지 않고 앞길을 열며 어기차게 나아가는 의지의 소유자들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하근찬 문학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솟아오르는 희망과 의지를 품고 있는 문학인 것이다.
1972년에 간행된 장편 「야호」는 야호(요강)가 상징하는 여성의 삶을 그린 것인데 여성 수난사를 다룬 우리 소설 가운데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무대는 경북 영천의 농촌이다. 이 마을 출신의 여인 갑례의 삶이 중심내용이니, 이른바 ‘여자의 일생'형 소설이다. 대동아전쟁에서 정점에 이르는 일제 통치의 폭력성과 6·25전쟁의 폭력성은 그녀의 삶을 휩쓸어 파괴하고 상처 입힌다. 무력하기에 속수무책,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대대로 물려온 ‘야호'에는 다산과 부부화락을 비는 기원이 깃들었지만 그러나 갑례 당대를 살았던 대부분 농촌 여인네들의 삶은 갑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갑례의 여로는 곧 그녀들의 여로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찌 농촌 여인들의 삶만 그러했겠는가. 이 시대 평범한 조선인들 일반의 삶이 그러했으니 그녀의 여로는 곧 그들의 여로이고 그것은 우리의 파행적인 근대사의 흐름에 대응한다. 작가의 역사해석은 소박하지만, 그러나 지극한 애정에서 비롯된 연민의 눈으로 그려내는 평범한 농민들의 수난상은 더 깊은 역사해석에 기초한 어떤 작품들의 그것보다 절실함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 밖에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 「남한산성」(1979), 「월례는 본래 그런 여자가 아니었습니다-월례소전」(1981), 「산에 들에」(1984) 등과 중편 「기울어지는 강」(1972)과 「직녀기」(1973) 및 단편 「왕릉과 주둔군」(1963), 「일본도」(1971), 「임진강 오리떼」(1976) 등이 있다.
한국문학상(1970), 조연현문학상(1983), 요산문학상(1984), 류주현문학상(1989) 등을 수상했으며 보관문화훈장(1999)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