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평양 출생.
1928년 진남포 풍정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아버지가 공무원생활을 청산하면서 평안남도 평원군 영유보통학교로 전학한다. 유년시절 영화를 관람하다 3일 정학처분을 받았다. 1934년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했고, 1939년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도야마고등학교(대학 3년제 예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1940년릿쿄대학(立敎大學)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44년 일본은 전시동원체제로 전환하여 학도병을 징집했고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징집되어 중국 서주 근처 사병으로 배치되었다. 남경사관학교로 파견된 자리에서 최남선 등이 한국학도병을 향해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연한 내용을 들었다. 한국문인들의 친일행각에 대한 고민이 깊어져 일어보다 영어로 된 책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남경에서 해방을 맞았고 1946년 상해를 거쳐 피난민을 따라 부산항에 도착했다. 귀국 이후 미군정청 농림부에 소속되어 번역관 일을 했고, 1947년이화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명동출입을 시작한다. 이때 박목월도 이화여고에 국어교사로 부임해왔고 박두진, 조지훈, 김병욱 등과 자연스레 친교를 맺고 어울리게 된다.
1948년『연합신문』에 「신개지에서」를 투고하여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신천지』10월호에 서구이론을 소개하기도 한다. 1949년 프랑스쟌느 메레의 소설 『어린공주』를 번역해 출판했으나 전쟁 중 잃어버렸다. 1950년 그는 박목월이 주재하는 『시문학』의 창간을 도왔다. 그는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애상적인 시 정서와 거리두기를 시작하는데, 피난생활을 통해 현실비판 의지가 강해졌다. 이런 경향은 〈후반기〉동인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다는 평가를 받게 한다.
1956년김경린이 이끄는 동인 〈다이얼〉에 「그러한 때」, 「석양의 도시」, 「오후가 흘러드는 창」, 「골목」, 「길」 등을 발표했고 이들의 엔솔로지가 1957년 『현대의 온도』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해운공사에서 미군통역일을 맡아보다가 1957년 1월부터 1961년 2월까지 영국 런던 주재원으로 파견된다. 영국체류기간 동안 해외문단동향을 김수영 시인에게 전했고 국내소식도 전해듣는다. 1961년 첫시집 『변모』를 출간했고, 1963년 대한재보험공사 강의 통역을 맡으면서 이 회사 해상보험 담당이사가 되면서 영국과 프랑스를 다니면서 새로운 문학흐름에 주목한다. 1967년 두 번째 시집 『너의 정담』(삼애사, 1969)을 출간한다. 1971년 세 번째 시집 『나날의 의미』(삼애사), 1978년 평론집 『현대시와 그 주변』(정우사) 등을 발간한다. 1974년 『현대시학』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다.
박태진은 해방이후 한국문단 현실을 새롭게 조망하고자 한 시인이다. 영국체류경험으로 새로운 문학을 추구했는데 구세대의 전통성을 문학유산으로 계승하는 일을 고민하였다. 그의 문학성과를 1950년대 〈후반기〉동인이 보여주었던 전통성과 모더니즘의 틀로 묶는데 멈추지 말고, 그가 추구하고자 한 문학성, 당대시인과 변별되는 새로움을 모색한 시인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는 외국시인의 작품을 번역 소개하면서 세계문학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문학평론가협회상(1985)
서울문학상(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