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통영 출생. 호는 초정(草汀 · 艸汀 · 草丁).
1927년 통영보통공립학교 입학하여 교지 『여황(艅艎)의 록(綠)』에 동시 「꿈」을 실었고, 1933년에 졸업하고 집안형편이 어려워 남강인쇄소 인쇄공이 되었다. 월사금이 없어 쫒겨 나서는 산으로 올라가 동요 「삐비」를 지었다. 1930∼35년 사이에 최초 시조동인지 『참새』 동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문학청년의 시절을 보냈다. 1936년조연현과 함께 활동한 동인지 『아(芽)』에 「무궁화」를 발표하여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고 두만강 근처 함북 웅기로 유랑을 떠났다. 1938년함북 청진 서점에서 일하면서 김용호, 함윤수 등과 『맥(貊)』동인으로 활동했으며 뒤에 임화, 서정주, 박남수, 윤곤강 등이 합류했다. 1939년『문장』지에 이병기의 추천으로 「봉선화」가 실렸고, 같은 해 동아일보 시조공모에 「낙엽」이 당선되었다.
1940년 통영으로 귀향 남원서점을 경영하였고, 이 서점에 걸린 애국지사 이후의 우국시가 문제되어 통영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1942년에 삼천포로 피신하였다. 1945년 2월 일본헌병대의 검거 소식을 미리 알게 되어 8월 15일 해방이 될 때까지 윤이상과 함께 서울에서 피신하였다. 해방되던 해에 김춘수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조직 예술운동을 했으며, 11월삼천포문화동지회를 창립하여 한글운동, 교가 보급운동을 이끌었다. 1946년부터 20여 년 동안 부산, 마산, 삼천포, 통영 등지에서 교사생활을 하였다. 1947년 첫 시조집 『초적(草笛)』(수향서헌)의 편집, 조판, 인쇄 등을 직접했으며, 1949년 『고원(故園)의 곡(曲)』(성문사), 『이단의 시』(성문사)를 발표했다. 윤이상은 그의 시 「추천(鞦韆)」, 「봉선화」에 곡을 붙였다. 1952년에 동시집 『석류꽃』(현대사)을 출간하였다. 문교부편수국 심의위원을 지냈고, 1953년에 출간한 시집 『의상(衣裳)』(현대사)출판기념회에서 이중섭은 닭그림으로 축하를 보탰다. 1954년 충무공 이순신 시비건립을 주도했고 통영문인협회을 재건하고 『참새』지를 타블로이드판으로 복간했다. 1956년 시집 『목석의 노래』(청우출판사)출간, 1958년 동시집 『꽃속에 묻힌 집』(청우출판사)을 펴냈고, 1960년 『한국시단』 편집장을 맡았고 사회공로훈장을 받았다. 1963년 서울로 이주하여 골동품가게 아자방을 경영하였다. 1972년일본 도쿄에서 서화작품전을 개최하였고, 2000년대까지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1973년 삼행시집 『삼행시육십오편』(아자방)을 펴냈고, 1975년 산문집 『시와 도자』(아자방)를 출간, 1980년 회갑기념시집 『묵을 갈다가』(창작과비평사)를 출간, 1983년 이호우와 함께 『한국현대문학대계』22를 저술했으며 1995년 동인지 『맥』을 재창간, 1998년 시집 『느티나무의 말』(상서각)을 출판하였다.
삼양문화상(1997)
보관문화훈장 거절(1995)
충무시문화상(1994)
중앙시조대상(1982)
노산문학상(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