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수옥리 출생으로 서당을 다니다 1921년평양 사립 광성보통학교에 입학, 1926년평양 사립 광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년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김관호가 지휘하던 삭성회연구소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1928년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으나 졸업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창작활동과 단체활동을 전개하였다. 자녀로는 최지혁이 있다.
1928년 처녀작 발표를 시작으로 꾸준히 인물화를 발표하였고 1932년「안양의 좌상」이 조선미술전람회에 특선을 하였다. 해방 이전까지는 1932년, 1938년, 1942년에 평양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해방후인 1945∼9년에 평안남도 인민위원회교육부 미술계장, 1946년 3월에는 평안남도 미술동맹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조선인민대표단의 소련방문시 가지고 갈 축기를 도안했으며 1946년북조선예술총연맹 결성시 미술동맹 중앙위원회 위원, 상무위원으로 선거되고 동맹서기장으로 임명되었다.
1947년 전국문학예술축전 미술전람회에 「스탈린원수 초상화」가 1등상을 수상받는 등 다양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표창장과 공로메달을 수상하게 된다. 그는 미술 뿐 아니라 공예, 영화 등의 분야에서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57년 개인전을 개최하고 1958년, 조선미술가 대표단 단장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림백과 함께 2인전을 개최하였다. 1961년 이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미술가로 평안남도에서 풍경화를 제작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백두산」(1958년), 「농가」(1956년), 「경성풍경」(1959년), 「동해풍경」(1961년), 「금강산구룡연」(1962년) 등이 있으며 170여 점의 작품이 조선미술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조선미술전람회 특선(1932년).
전국문학예술축전 미술전람회 1등상 수상(194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