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군 장기면 평기리 출생, 이당 김은호 문하에서 동양화에 대한 기초수업을 연마한 후 1930년대 말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1942년 제국미술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하였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공주 관립 여자사범학교 교사, 해방 후 서울 휘문중학교 미술교원으로 있으면서 조선미술가동맹 서울지부 총무과장을 지냈다. 1950년 9월 28일에 월북하여 평양미술대학 교원, 조선미술가동맹 현역미술가로 평양과 지방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9일 공주군 장기면 평기리 151번지에서 육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30년대 상경하여 이당 김은호 선생 문하에 입문하여 동양화를 배우고 1930년대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미술공부를 하였다. 유학시절 재동경미술협회 제3회 전람회에 참여하여 「태산목」(1940년)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였다.
「수림의 잔설」(1940년), 「석양」(1940년), 「고성의 잔설」(1942년), 「부인좌상」 (1942년) 등의 작품을 국내외 전람회에 출품하였는데 최근배의 선전 동양화평을 보면 그의 작품들이 문부성미술전람회의 전위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1943년 윤희중의 삼녀 윤석완(尹錫婉)씨와 결혼하여 자녀 둘을 두었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산하에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결성되어 회원으로 가입 활동하였고, 1946년 2월 18일 결성된 조선조형예술동맹의 회화부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화 「거리의 청년」(1948)을 제작하였으며 1950년 월북하였다.
그의 작품은 조선화 고유의 기법을 습득하여 선적인 표현이 뛰어나고 선과 색의 조화로움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표작으로는 「금강도하작전」(1951년), 「농민초상」(1952년), 「서평양철공장에서」(1955년), 「샤만호 격침」(1960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