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기에는 조선의 여러 제도를 계승했음에도 불구하고 관제개편이라는 명분 하에 상당히 많은 부분이 개혁되거나 혹은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의 장악제도 역시 대한제국기에 쇠락했다. 조선전기부터 지속되었던 장악원은 1908년 이후 예부의 하위 기관으로서의 기능이 거의 정지되었고, 심지어 병부의 최하위 단체에 속했던 군악대 중 하나였던 내취까지 통폐합하면서 조선시대와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는 국가적 이념을 실현할 장악기관이 부흥되거나 설립될 수 없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고 있었던 민간의 지사들은 1909년에 조선 장악원 전통의 단절을 막고 전통적 가무를 계승·회복하며 새로운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음악기관으로서 서울 도동(刀洞)에 조양구락부를 설립했다. 조양구락부의 설립에 대해 황실은 내탕금 2,400원을 내렸고, 매달 200원의 지원금을 내렸다. 그러나 이 집단은 국운이 기울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고, 1911년에는 조선정악전습소로 전환되었다.
조선정악전습소의 구성원은 조양구락부 시절과 거의 같았다. 예를 들면 함화진 같은 궁중악사 출신의 음악가, 조이순, 하순일 등과 같은 서울의 민간 풍류계의 명인들, 그리고 김인식과 같은 당시 양악의 선구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여러 학생들을 모집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학생들을 지도했다. 교육 프로그램 중에는 조선의 민간 고급음악과 당시 수입된 서양음악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양구락부는 1909년 전후로 관기 출신 기생들의 연합체였던 기생조합의 교육을 담당했고, 1912년 이후로는 시동 기생들의 학습도 도왔다. 이러한 교육은 조선정악전습소의 ‘여악분교실’에서 맡았다. 여악분교실의 교육 내용은 과거의 관기들의 레퍼토리였다. 조양구락부·조선정악전습소에서 기생을 학습시킨 결과는 관기 출신 기생과 민간 기생 간의 가무 격차의 해소였다. 나아가 조선정악전습소의 학습 프로그램은 이후로 설립된 서울의 기생학교의 기초 과목이 되었다.
조선정악전습소 출신 음악가들 가운데 일부 남성 졸업자들은 1920년대 이후 전문적인 음악가로서 극장 공연 활동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육 목표는 남녀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여성음악교육의 경우 여악분교실을 별도로 운영했고, 남성들의 음악교육에서는 전통적인 고급음악과 서양음악을 교육시켰다. 서양음악이 교육과정 속에 포함된 것은 한국교육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20세기 최초로 고급음악을 지향한 민간의 음악기관이었다. 조선정악전습소는 이화여전 음악과가 설립되기 전에 유일하게 운영되었던 전문 음악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당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양구락부 및 조선정악전습소와 관련했던 기생들은 내실 있는 공연을 펼쳤고, 남성들은 음악계 및 음악교육계의 주역이 되었으며, 양악 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했던 학생들은 1930년대 이후 한국 양악계의 거목이 되었다.
조선정악전습소의 음악교육 목표는 예악이념 가운데 정치교화론을 고수하는 한편 음악을 통해 민첩하게 근대 국민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서양음악도 능동적으로 수용해내기는 했지만 근대적 전문 음악가 양성이라는 목표를 균형감 있게 실천하는데는 한계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