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강열은 해방 이후 「작품」·「작품A」·「작품B」 등을 그린 판화가이다. 이칭은 유강렬로 염색공예가이기도 하다. 1920년에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1976년에 사망했다. 일본 유학 중 염색을 배워 1950년대까지 염색공예가로 활동했다. 1958년 미국 유학 후에는 주로 판화가로 활동했다. 대학에 재직하며 각종 공모전의 심사위원이나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프랑스대사관·워커힐미술관 등의 실내디자인을 담당하기도 했다. 염색 및 판화작가로서 「호랑이」·「가을」 등의 작품도 남겼다. 사후 그의 작품을 모아 『유강렬작품집』이 발간되었다.
유강열(劉康烈)은 1920년 8월 2일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13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아시후중학교〔麻布中學校〕를 거쳐, 1938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건축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미술에 흥미를 느껴 1940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공예도안과에 다시 입학하여 1944년에 졸업하였다.
대학 재학 중인 1941년 일본공예가협회전에 염색작품을 출품하여 가작으로 입선한 뒤, 도쿄에 있는 사이토〔齋藤〕공예연구소에서 도제식으로 염색교육을 받았다. 귀국한 이후 이중섭(李仲燮), 한묵(韓默) 등과 교유하며 작품생활을 하다가 6 · 25 때 월남하여 부산에서 최순우(崔淳雨), 박고석(朴古石), 김환기(金煥基), 장욱진(張旭鎭) 등을 만났다.
1951년 부산에서 수출공예품전을 기획, 심사하면서 공예산업의 육성에 힘을 쏟았다. 경상남도 도청을 설득하여 통영에 2년제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를 설립한 뒤 주임강사로 근무하며 나전칠기의 발전에 노력하였다. 당시 어려운 처지에 있던 이중섭을 뒷바라지하여 작품을 제작하게 하였다.
1954년부터 상경하여 국립중앙박물관 부설 한국조형문화연구소의 연구원으로서 판화와 염색강습회를 주관하였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및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출강하였다. 1958년 미국 록펠러 재단의 초청으로 도미하여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 및 프렛 컨템퍼러리 그래픽 아트센터(Prat Contemporary Grapic-Art center)에서 수학하였다.
1960년 귀국 후 1976년 사망할 때까지 홍익대학교에 재직하면서 공예학부장, 2부대학장, 산업미술대학원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부터 1974년까지 대한민국미술대전(이하 국전으로 약칭함)의 심사위원을 비롯하여 각종 공모전의 심사위원이나 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 1967년부터 1976년 작고 때까지 동아공예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을, 상공미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전국관광민예품 경진대회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유강열은 주요 공공건축물의 건축자문위원으로 활동하거나 실내디자인을 담당하였다. 1961년 프랑스대사관의 실내디자인, 1962년 워커힐미술관 실내디자인 및 명동 국립극장 무대막 제작, 1966년 자유센터 승공관 전시디자인, 1969년 국립중앙박물관 실내디자인, 1971년 국립중앙박물관 내부 세라믹 벽화 제작, 1974년 국회의사당 세라믹 벽화 제작 등에도 큰 역량을 발휘하였다. 1976년 11월 7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유강열은 일본에 유학했을 당시 염색을 체계적으로 배웠으며, 귀국 후 1950년대까지는 염색공예가로 활동하였다가, 1958년 미국 유학 후 1960년대에는 판화가로 주로 활동하였다.
우선 염색 작가로서의 작품 활동은 초기 국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52년 부산 국무원에서 전시된 「호랑이」를 비롯한 납염작품 2점은 신라시대부터 성행하던 납염공예 작품의 부활이라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출품된 「호랑이」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대부분 전통적인 민화를 소재로 삼아 파라핀의 균열로 생기는 크랙 라인(crack line : 균열선)이 화면 전체에 분포되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1953년 제2회 국전에 출품한 「가을」은 아플리케 기법으로 구호물자인 의복 천을 뜯고 오려 2m 크기로 바느질한 것이었는데, 그해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다. 1954년 제3회 국전에 출품한 「향문도(香紋圖)」는 염색작품으로 차석상에 해당되는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1955년 제4회부터 국전에 추천작가로 활동하였다. 제4회 때에는 「만추」를, 제5회 때에는 「계절」을, 제6회 때에는 「바다와 나비」, 「해풍」 2점, 제13회에 2폭짜리 납염 가리개인 「작품」을 출품하였다. 1975년 광복 30주년 한국공예대전에 「작품A」와 「작품B」를 출품하였다. 이러한 유강열의 납염 작품은 전통적인 대상을 추상화하고 굵은 검은색 테두리에 자잘한 크랙 라인이 강조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후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염색공예계에 활력을 불어넣어 각급 대학에 염색교육이 활성화되었으며, 섬유미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유강열은 1958년 미국에서 판화를 배우고 유럽 각국을 거쳐 귀국한 이후 판화작가로 활약하였다. 1959년 미국 현대판화가 100인전에 동양인 최초로 초대되어 「작품」 등을 출품하였다. 이때 출품된 작품들이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 뉴욕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록펠러재단(Rockfeller foundation)에 소장되어 있다.
1964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São Paulo Biennial)에 판화작품인 「작품A」, 「작품B」, 「작품C」를 출품하였다. 1968년 이상욱(李相昱)과 함께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결성하였고, 1970년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를 주도하였다. 1972년 제12회 국제판화비엔날레에 「작품2」를 출품하였다. 그의 판화 작품은 민화 모티브를 목판화의 투박한 기법으로 응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국제전에 활발하게 출품하여 한국 판화의 토대를 구축하는 데 일조를 하였다.
1962년에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 국립중앙박물관 건설 상임위원으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73년 어린이대공원 건설위원 및 디자인자문을 하여 서울특별시장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유강열은 생전에 한 번도 개인전을 연 일이 없었는데, 그의 사후 제자들이 유작들을 모아 1978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주최로 ‘유강렬 초대 유작전’을 열었다. 1981년 1월 27일부터 2월 8일까지 신세계미술관에서 「유강렬 초대 회귀전」이 열렸으며, 그의 작품을 모은 『유강렬작품집』이 발간되었다. 2000년 8월 유족들은 유강열의 판화 3점과 그가 생전에 모았던 조선시대 민화 및 민예품 304점, 그리고 관련 전문서적 1,400여 권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경기도 마석리 모란공원묘지의 묘소에 추모비와 화비(畫碑)가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