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준은 해방 이후 제2군단장, 육군 군수사령관, 국방부 방위산업차관보 등을 역임한 군인, 정치인이다. 1928년 강원도 명주군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했으며 5·16군사정변 이후에도 끝까지 군에 남은 정통파 군인으로 평가받는다. 1965년 9월 베트남 파병 당시 주월 제100군수사령관으로 활동한 이래로, 국방부 군수국장, 제2군단장, 육군 군수사령관, 국방부 방위산업차관보를 역임했다. 1981년 정치인으로 변신해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강릉·양양·명주 지역에 출마해 11대, 1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28년 강원도 명주군 왕산면 송현리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 호는 송현(松峴)이다. 1945년 평양 광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를 8기로 졸업했다. 1960년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며, 이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연구과정,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 방위산업연구과정을 수료하는 등 군 내부의 대표적인 학구파 군인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5 · 16군사정변 이후 육군사관학교 8기 동기생 대부분이 정치권 및 정부 각료로 이동하던 상황에서도 끝까지 군에 남은 정통파 군인으로 평가받는다.
1965년 3월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5년 9월 베트남 파병 당시 십자성(十字星)이란 별칭을 가진 주월 제100군수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967년 5월 육군본부로 복귀해 군수참모부 보급처장을 역임했으며, 1968년 4월부터 1969년 3월까지 보병 제15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사단장직을 수행했다. 제15사단장직을 마친 후 곧바로 국방부 군수국장으로 발령받았고,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의 미국 방문 당시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이후 국방부 군특명검열단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했다.
1970년 6월부터 1973년 9월까지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차장 및 부장직을 수행했으며, 1972년 1월 군수참모부 차장 재직하며 양해경 해군소장의 후임으로 군사정전위원회 제22대 한국측 수석대표를 지내기도 했다. 1975년 9월 제2군단장으로 승진했으며, 1977년 5월부터 육군 군수사령관, 1977년 9월부터 1980년 2월까지 국방부 방위산업차관보로 활동했다. 방위산업차관보 재직 중에는 군 현대화 계획을 추진해 한국 방위산업을 한 단계 올려놓은 공로자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육군 중장 예편과 동시에 1980년 2월부터 12월까지 강창성 청장의 후임으로 제2대 해운항만청 청장을 지냈으며, 1981년 1월 민주정의당 창당준비 15인 위원으로 참여해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민주정의당 강원도지부 위원장 및 중앙집행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81년 3월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강릉 · 양양 · 명주 지역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제11대 국회에서 농수산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1983년에는 민주정의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한국 · 뉴질랜드의원 친선협회 회장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1985년 4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강릉 · 양양 · 명주 지역에 출마해 재선되었으며, 민주정의당 중앙위원회 수석부의장으로도 활동했다. 1988년 3월에는 6공화국 초대 내각으로 입각해 제32대 교통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89년 3월부터는 한국조폐공사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이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 공천에서 배제되었으며, 5공화국 인사들로 구성된 민우회(民友會)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밖에 한국전략문제연구소 회원, 서울세종로터리클럽 이사, 자유총연맹 이사, 사단법인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이사장, 학교법인 동아학숙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1995년 민주당의 범야권 통합 때 민주당에 입당해 1997년 9월 민주당 부총재로 천거되었지만 고사했다.
한국전쟁 때의 공적으로 받은 훈장만도 금성무공훈장을 포함해 9개에 이르며, 그 외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대만 수운휘훈장, 보국훈장 통일장, 대수경성훈장, 미국 리전오브메리트(Legion of Merit) 등을 수여받았다. 2007년 11월 30일 노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