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계강(分界江)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두만강 위쪽을 흐르다가 두만강으로 합류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강으로, 사실상의 해란강(海蘭江), 혹은 해란강에 합류하는 부르하퉁 강[布爾哈通河]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다.
‘분계’라는 명칭은 만주어 단어 ‘풍커(fungke)’, 혹은 ‘풍쿠(fungku)’가 ‘풍가(豊家)’, ‘풍계(豊溪)’ 등으로 음차되었던 것에서 기원한다. 처음에는 ‘경계를 나눈다’는 의미가 없었으나, 정계비 설치 이후 조선과 청나라 간의 경계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그것이 경계를 나눈다’는 의미의 한자로 쓰이기 시작했다.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롱징시[龍井市]를 흐르는 해란강은 안도현(安圖縣) 인근에서 발원한 부르하퉁 강을 만나 도문시(圖們巿) 근처에서 가야하(嘎呀河)와 합쳐진 뒤, 최종적으로는 두만강으로 합류된다.
정계 이후 심화되는 영토의식은 토문강을 송화강(松花江)과 연결되는 물줄기로 가정하거나 혹은 분계강을 별도로 설정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해란하의 발원지에 관한 한 『성경지(盛京志)』의 정보는 더 이상 신뢰받지 못 했다. 이 물줄기는 ‘분계강’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분계강에 관한 인식은 명확한 지리 정보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주장하는 사람마다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대체로 백두산에서 흘러내려서 온성부 인근에서 두만강과 합류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정조시기가 되면서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에 기반한 새롭고 광범위한 지리지식이 알려지기 사작했다.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분계강이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서북계도(西北界圖)』도 온성부에서 두만강에 합류되는 물줄기가 백두산에서 발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확대된 영토의식은 『서북계도』에 분계강 명칭과 선춘령의 두만강 이북설로 그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분계강은 정계비가 설치된 후 조선 지식인 사회에서 영토의식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지명이며, 현재 살아있는 지명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