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론(華夷論)은 중화를 받들고 이적을 물리친다는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 주나라를 높인다는 존주론(尊周論)과 통하는 말로서, 조선의 세계관과 대외정책에 골간이 되었던 사상이다.
주나라 왕의 도읍지와 그 통치 구역을 뜻했던 중국의 범위는 춘추전국시대가 되면서 훨씬 넓어졌다. 중국은 지리적으로는 그 시대의 여러 나라를, 문화적으로는 선진 지역을 뜻하는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주나라 왕실이 만들어낸 천명 논리는 유학의 정치사상으로, 또 역대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받아들여졌다.
화이론은 한족이 처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였다. 한족의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면, 관용과 개방의 논리, 보편주의의 논리가 되지만, 오랑캐 왕조가 한족 왕조를 위태롭게 하면 매우 배타성 강한 논리로 돌변한다. 중화 세계의 가장자리에 있는 오랑캐는 중화의 우월성을 꾸며주는 장식품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었다.
조선은 성리학에 내재한 화이론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중화 세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자기 자리를 정했다. 바로 ‘소중화(小中華) 의식’이다. 주자의 원전을 들여와 공부하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역사와 문화가 중화와 얼마나 가까운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중국 대륙의 주인이 명에서 청으로 바뀌자, 조선을 중화문화의 정통을 계승한 유일한 나라로 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오랑캐에게 복수하는 일이 불가능해지자, 주나라의 문명을 높이는 쪽에 집중했다. 이 논리에 따르면, 지켜야 할 주나라의 문명은 결국 조선 자신이 계승해온 중화문명이다. 대보단(大報壇)은 이런 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조선이 중화를 내면화하려 할 때, 혈연적 기준은 가장 불편한 것이었다. 문화적 기준은 그 반대다. 송시열(宋時烈), 허목(許穆), 이익(李瀷) 등이 가진 중화의식의 밑바탕에는 문화를 기준으로 중화를 판단하려는 공통의 정서가 있었다. 정교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은 지리와 풍토의 차이였다. 소중화 의식은 풍토의 차이를 전제하면서도 그것을 중화의 틀로 설명하려 한 논리다. 명·청 교체 이후, 지리적 차이는 좀 더 정밀하게 설명되어야 했다. 송시열은 지리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문화를 침해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종휘(李鍾徽)는 풍토적 유사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지리적 차이가 가지는 의미를 전유하려 했다. 그는 또 중화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역사적 영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런 중화 인식의 토대 위에서 세계를 보고 설명하려 했다.
화이론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조선 성리학에 기초한 조선 중화사상이 한말 의병운동의 초석이 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그 사상이야말로 조선이 청 중심 국제질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최근에는 여러 정파들이 제기한 화이론 사이의 균열이나, 화이론 자체의 변화 과정에 주목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화이론, 존화양이론, 존주론, 중화사상 등으로 표현된 일련의 관념들은 정치사, 사상사, 문화사, 지성사, 대외 관계사를 막론하고 조선시대 사람들의 문제의식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