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청은 조선의 나선정벌(羅禪征伐: 청과 함께 동진하던 러시아군을 흑룡강 어귀에서 물리친 전쟁)과 관련된 지역으로,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러시아군을 흑룡강 일대에서 저지한 전투의 이동 경로에 위치한 곳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의 요청에 의해 조선의 효종(孝宗)은 두 차례에 걸쳐 나선정벌(1차: 1654년, 2차: 1658년)에 나섰다. 당시 조선군참전이동로(朝鮮軍參戰移動路)는 회령에서 두만강을 건넌 후, 삼합 – 오랑캐령 – 용정 – 해란강 – 연길 – 부르하통하 – 백초구 – 가야하 – 왕청현 – 천교령 – 노송령 – 목단강 – 영고탑으로 이어지는 왕청현 경내의 주요 교통로를 이용하였다. 이 교통로는 청대 훈춘에서 영고탑에 이르는 관도(官道), 즉 역참로(驛站路)였다.
근현대시기 동북지역 항일 독립무장투쟁의 근거지였던 왕청현에는 서일(徐一)과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중심이 되어 이끌었던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사관양성소가 있어 무장투쟁과 교육에 힘썼으며,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1920년)의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왕청은 요새를 뜻하는 ‘보루(堡壘)’의 의미를 가진 만주어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발음은 ‘왕흠(旺欽)’이다. 후에 대두자천(大肚子川)으로 이름을 바꿔 불렀고, 청에 의해 ‘흠(欽)’이 ‘청(淸)’으로 바뀌었다. 흥경(興京)에 같은 이름의 왕청변문(旺淸邊門)이 생기면서 같은 음차의 ‘왕(旺)’을 ‘왕(汪)’으로 고쳐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현은 남북의 길이가 108㎞, 동서의 폭이 152㎞에 달한다. 동쪽으로는 훈춘시, 서쪽으로는 돈화시, 남쪽으로는 도문시와 연길시, 북쪽으로는 흑룡강성의 목릉시 · 영안현 · 동령현 등과 인접하고 있다. 인구는 2013년 기준으로 약 30만 명이며, 비율은 한족이 약 64%, 조선족이 약 32%를 차지하고 있다. 길림성의 여러 현 중 두 번째로 크며, 산하에 8개의 진(鎭)과 1개의 향(鄕)이 있다.
평균 해발고도는 806m로 산악지대에 속한다. 산림구역이 현 전체 면적의 89% 이상을 차지하는데, 이러한 풍부한 산림자원으로 인하여 왕청현은 ‘녹색명주(綠色明珠)’의 고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에는 알하하(嘎呀河), 수분하(綏芬河), 혼춘하(琿春河) 등 3대 하천과 함께 중알하하(中嘎呀河) 등이 흐른다.
왕청은 한대에는 읍루(挹婁), 당대에는 발해(渤海), 명대에는 아포달리위(阿布達哩衛)에 속하였고, 청대에는 휘춘부부통(輝春副部統)의 관할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개발이 된 시기는 1865년(동치 4)에 봉금령(封禁令)이 해제되면서 금 채굴과 인삼 채삼으로 인해 사람들이 살게 되면서부터이다. 선통제(宣統帝)에 와서 왕청설치국이 설립되었고, 중국 성립 이후 1953년 9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치되면서 자치주에 포함되었다.
왕청현에는 11개 소수민족 집거지가 있으며, 조선족 집거지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조선족 전통문화예술인 ‘상모춤(象帽舞)’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전국 단위의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인 문화대장(文華大奬)을 비롯하여 우수표현상, 특별공헌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 이 춤은 2006년 국무원(國務院)의 비준 아래 국가급비물질문화유산(國家級非物質文化遺産)으로 등록되었다. 또 현의 천교령진(天橋嶺鎭)을 중심으로 검은귀버섯 재배지가 많은데, 특산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