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파는 고대 한중 무역의 주요 거점으로 중국 절강성 동북부 해안에 위치한 항구도시이다. 1367년 명나라 주원장이 해상 연안을 봉쇄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대외적으로 개방하고, “바다를 사로잡으면 파도가 잔잔하다.”라는 뜻을 따서 영파로 이름을 고쳤다. 중국 상인을 대표하는 ‘닝보방[寧波幇]’의 원류로 고대 한중 무역의 주요 거점이었다. 당나라로 향했던 구법승(求法僧)들이 거쳐 가는 주요 거점으로 ‘신라초’, ‘신라방’ 등 신라의 유적이 있다. 고려와 국교를 맺고 문물을 교류한 송나라 때에는 ‘고려사(高麗司)’와 ‘고려사관(高麗使館)’이 설치되었다.
영파는 중국 상인을 대표하는 ‘닝보방〔寧波幇〕’의 원류이자 요람으로 통한다. 당 · 송대부터 대외 해상무역항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향했던 구법승(求法僧)들이 거쳐 가는 고대 한중 무역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미 ‘신라초(新羅礁)’, ‘신라방(新羅坊)’ 등 신라의 유적이 있는 영파는 특히 고려와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대륙을 통일한 송은 당시 북방의 강건 세력인 거란(契丹)을 견제하기 위해 고려와 국교를 맺었고, 고려 역시 송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해 조정의 사신을 파견하는 등 문물교류를 실시하였다. 사행과 더불어 고려 상인들이 예성강 벽란도를 통해 송으로 금 · 은 · 나전칠기 · 화문석 등의 특산품을 수출하였고, 명주의 해상교역로를 통해 송의 비단 · 서적 · 도자기 · 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1117년 명주에 ‘고려사(高麗司)’를 설립하여 사무를 맡게 하고 ‘고려사관(高麗使館)’을 설치하여 사절들에게 편리를 제공하였는데, 송은 고려의 사신을 조공사(朝貢使)가 아닌 국신사(國信使)의 예로 대하였다.
영파의 역사적 연원은 서기전 2000년대인 하대(夏代)에는 ‘은(鄞)’, 당대에는 ‘명주(明州)’,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에는 ‘오월국(吴越國)’, 북송과 남송대에는 ‘경원부 절동로(浙東路)’에 속했다. 1367년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이 해상 연안을 봉쇄하는 과정에서 명주만은 대외적으로 개방하였다. 1381년에는 “바다를 사로잡으면 파도가 잔잔하다.”라는 뜻을 따서 명주를 영파로 개칭하였다.
1658년(순치 15)에 ‘저소태도(宁紹台道)’를 세워 영파를 관할했으며, 1840년 아편전쟁 당시 영국에 점령되었다가 1842년 남경조약으로 개항하였다. 1927년에 절강성 영파시가 되었으며, 1949년부터 본격적인 도시 건설이 시작되어 1994년에는 부성급직할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영파는 중국 강남의 여타 도시와 마찬가지로 수향(水鄕)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7천 년 전에 시작된 벼농사로 대표되는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의 발상지로 중국 대륙 동남부 장강 삼각주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중국 4대 불교 성지의 하나인 보타산(普陀山)이 위치한 주산군도(舟山群島)가 천연 병풍처럼 둘려있다. 서쪽으로는 소흥(紹興)의 승주(嵊州) · 상우(上虞)와 접하고, 남쪽으로는 삼문만(三門灣)과 태주(台州)에 임하며, 북쪽으로는 항주만과 상해가 가깝다.
고대 이래로 대외무역항인 영파는 ‘해상 실크로드의 동쪽 출발지 항’ 역할을 하였다. 청대에는 일본과 구리를 거래하기도 하였다. 아편전쟁 이후 상해로 유입된 영파 상인들은 황포강 유역을 기반으로 상해 상권을 장악하였다. 상해 주민 고향의 약 1/4이 영파로 알려져 있다. 영파의 약칭은 ‘용(甬)’이다. 2014년 기준으로 인구는 약 5,838,000명이다.
영파시에서는 송과 고려의 교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고려사관을 월호공원(月湖公園)에 조성하여 한중교류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 고려사관에는 조선 성종대 절강성 태주부 임해로 표류하여 영파를 거쳐 간 최부(崔溥, 1454∼1504)의 기념관이 함께 조성되어 있다. 현재 중국 영파시와 교류하는 한국 내 지방자치단체는 자매도시로 평택시, 우호교류도시로 순천시와 대구광역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