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구(二道溝)는 1910∼20년대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의 방식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 이도구사건(二道溝事件)이 발생한 지역이다. 또한 한국 독립운동사의 금자탑과 같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이 전개된 역사의 현장이다.
이도구사건은 1913년 9월, 두도구(頭道溝) 일본영사분관경찰서 소속 경찰 2명이 이도구에서 인구와 학교 등을 조사하던 중, 조선인 촌민들과의 갈등이 발생하여 일본 경찰들이 폭행을 당하고 감금된 사건이다. 일본은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반일 의지를 억누르고 조선인 촌락이 한국 독립운동기지로 발전하는 것을 미연에 막고자 했다. 이와 동시에 조선인 촌락에 대한 조사활동을 계속하고 조선인에 대한 중국 지방 당국의 회유책을 배격하고자 관련 촌민들에 대해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중국 측의 반대로 주범 2명이 처벌을 받고 촌민 대표 1명이 영사관에 가서 사죄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제는 조선인 영사관 경찰을 이용하여 배일 활동에 대처하였기 때문에 향후 반일운동에 막대한 피해를 조성하였다. 그 후 조선인 사회의 반일운동은 비밀스럽고 소규모적인 활동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독립군의 활동은 대체로 중국 지방 당국을 자극하지 않는 전제 하에서 주로 조선인 경찰과 친일분자를 처단하거나 조선 국내 진공작전을 펼치는 등 활동 방식 위주로 전개되었다.
청산리대첩은 1920년 10월에 대한군정서 김좌진 장군과 대한독립군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무장독립군 연합부대가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약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일본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를 말한다. 이러한 청산리대첩은 봉오동에 진을 치고 있던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 남양수비대를 습격한 것을 서막으로 2차 봉오동 전투, 이도구 버들방천 매복전, 청산리 매복전, 천수동 기습전, 874고지 전투, 오도양차 포위 돌파전 등의 전투가 이어졌으며, 이 중 다섯 차례의 전투가 화룡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는 왕청과 안도 등 2개의 현과 돈화 · 용정 · 연길 · 도문 · 화룡 · 훈춘 등 6개의 시가 있다. 그중 화룡시 산하에 3개의 가도(街道), 8개의 진(鎭), 5개 향(鄕), 159개의 촌(村)이 있는데, 이도구(二道溝)는 촌 단위의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