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솥 (솥)

천마총 출토 청동정
천마총 출토 청동정
선사문화
개념
의례용으로 사용한 청동으로 만든 용기.
정의
의례용으로 사용한 청동으로 만든 용기.
개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정(鼎)은 ‘세 개의 발과 두 귀가 있으며 다섯 가지의 맛이 담긴 보배로운 용기’라고 적혀 있어 형태와 용도가 짐작되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환공(桓公) 2년 조에 대한 후한대 학자 하휴(何休)의 주석에는 '사(士)는 1 혹은 3정, 대부(大夫)는 5정, 경(卿)은 7정. 제후(諸候) 및 천자(天子)는 9정을 쓴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신분에 따라 해당 그릇의 소유 개수가 제한되었음이 확인된다.

연원 및 변천

한반도에서는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확인되기 시작하여 삼국시대까지 주로 사용된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의례용구로 귀중하게 사용되던 용기이다.

내용

정이라 불리는 솥은 종묘에 조상신을 모실 때 바치는 고기를 익히기 위해 사용된 예기로 군주나 대신의 권력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현황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108년 한군현이 설치된 서북한지역에서 청동솥이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보다 이른 위만조선대에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군현과 관련된 것은 평양 정백동 8호분, 평남 토성리, 평양 석암리 9호분, 평양 정오동 1호분, 평양 선교리 출토품 등이 있다. 정백동 8호분 출토품은 두 점인데 이중 한 점은 뚜껑에 고리가 3개 달려있어 뒤집으면 접시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형태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정에서 자주 확인된다. 이외에는 중국 한대에 중원에서 제작되어 군현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삼한의 것으로 울산 하대 23호 덧널무덤과 김해 양동리 441호 덧널무덤 출토품이 알려져 있다. 울산 하대 23호묘 출토품은 높이가 무려 49.8cm에 이르는 대형으로 한반도 출토품 중에서는 가장 크다. 또한 몸통에 제작할 때 거푸집 내형과 외형을 띄우기 위한 형지의 흔적이 많이 확인되는 점, 양쪽의 귀가 유난히 긴 점도 이 청동솥의 특징이다. 김해 양동리 322호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동정은 구연에 글자가 새겨져 있어 주목된다. 구연단에는 전서체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확인이 쉽지 않다. 판독된 글자는 "谷(西)□宮鼎, 容一斗(升), 幷(弁)重十七斤七兩, 七"의 14자이다. 谷□宮은 이 청동솥이 사용되던 곳이며, 나머지는 이 솥에 담기는 양을 나타낸 도량형과 관련된 내용으로 추정된다. 이 청동솥들이 만들어진 시기는 전한대로 생각되는데, 무덤에 부장된 연대는 3세기라서 장기간 전세가 되어 부장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청동솥이 확인되는데, 고구려의 것으로 집안의 칠성산 96호분과 우산하 68호분 출토품이 있다. 형태적으로 중국 한대의 것과 차이가 없지만, 아마도 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황남대총 남분, 황남대총 북분, 천마총 등지에서 청동솥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청동솥 3점과 철정 1점이 출토된 황남대총 북분은 가장 많은 수가 하나의 무덤에서 확인된 사례이다. 신라에서는 모두 대형의 왕묘급에서 청동솥이 출토되고 있어 주목되며, 고구려의 영향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중국에서 의례에 사용되는 청동솥이 한반도에서 확인되는 점은 중국적인 의례의 수용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여러 개의 청동솥이 함께 출토되는 사례는 많지 않은 점에서 하나의 귀중한 위신재로서 지배자들에게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신라고분 출토 청동용기 연구」(김문규, 『고고광장』1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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