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수청동유적(烏山水淸洞遺蹟)은 경기도 오산시 수청동 일대에 분포하는 초기국가시대부터 삼국시대에 걸쳐 조성된 백제 지역 지방 세력의 분묘유적이다. 지역 집단의 장례 양식과 최고 지배층의 유물 부장 양상을 나타내고 있으며, 생활유적으로 인근 오산가수동유적이 확인되어 화성길성리토성을 중심으로 자리한 지역 집단 중 하나로 이해된다. 또한, 왕성 주변에서 사치품으로 유입되던 중국 자기 중 넓은입청자항아리가 위세품으로 확인되어 오산수청동유적 일대가 백제 중앙에 의해 관리되던 지방의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오산수청동유적은 오산 세교택지개발로 인해 문화재 조사(4, 5지점)가 실시되면서, 2004년 12월 21일부터 2008년 12월 24일까지 독무덤을 포함하여 초기국가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의 분묘 총 303기와 수혈 45기가 발굴되었다. 2004년 오산시에서 실시한 수청택지개발지구 내 우미아파트 부지에서 조사된 7기의 분묘까지 합치면 총 310기의 분묘가 분포하고 있다.
오산수청동유적은 여계산의 동남측 구릉 자락에 자리하며 남측으로 궐동유적과 청학동유적이 자리하고 있어 초기국가시대부터 삼국시대 백제 한성기까지 조성된 경기 남부 지역 집단의 분묘군이다. 생활유적으로는 오산가수동유적이 인근에 있다.
분묘는 매장 주체부의 관재 및 설치 방법에 따라 토장, 목관, 이중 목관, 덧널무덤으로 세분되지만, 매장 주체부를 구획하고 보호하는 주구(周溝: 고분 주위에 두른 도랑 형태의 시설)의 유무에 따라 주구묘(널무덤+못)와 널무덤으로 분류된다.
총 310기의 분묘 가운데 주구묘는 171기이며, 주구의 형태는 구릉 정상에 있는 몇 기의 대형 분묘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반원형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주구묘와 널무덤 모두 매장 주체부의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자리한다. 굴광 후 격벽을 설치하여 부장 공간을 마련하였으나, 부장 공간의 바닥은 평평하게 정지하지 않고 비탈진 상태를 그대로 이용한 경우가 많다.
부장 유물 가운데 유리제 구슬은 철제 무기류가 부장된 유구에서 거의 확인되지 않으며, 철제 무기류가 부장되지 않은 유구에서는 유리제 구슬이 다량 확인되어 성별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유리제 구슬은 착장을 위한 경식 이외에도 4지점 7호 주구묘(총 6,821점)와 5-1지점 20호 주구묘(총 1,731점)처럼 목관 덮개 상부와 내부토 등에서 다량 출토되는 등 장송 의례에도 사용되고 있다.
귀고리는 총 10기 유구에서 금제, 금동제, 은제, 은박철제 등 다양한 재질이 사용되지만, 모두 가는고리 형태이다. 5-5지점 16호 널무덤과 20호 널무덤의 금제 방울과 소형의 금제환을 통해 드리개의 형태도 확인된다. 이 중 철제 무기류가 부장된 유구에서는 은제 귀고리의 사용 비율이 높으며, 철기류가 부장되지 않는 유구에서는 다량의 유리제 구슬이 공반된다.
토기류는 깊은바리토기와 둥근바닥짧은목항아리를 기본으로 부장되며, 이후 한성기 중앙 양식인 곧은입항아리와 뚜껑, 납작바닥항아리, 입큰항아리 등이 추가되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깊은바리토기는 동체부 문양이 민무늬이며 바닥 부분에 굽이 있는 형태에서 점차 깎기정면된 납작바닥에 석쇠무늬 · 꼰무늬 · 평행무늬의 두들긴무늬와 횡침선이 결합된 문양으로 변화한다. 두들긴무늬짧은목항아리는 동최대경에 비해 높이가 낮고 어깨 부분이 발달한 형태에서 동최대경에 비해 높이가 높은 구형의 형태로 변화한다.
철기류는 쇠칼, 쇠화살촉, 화살통, 비닐갑옷, 쇠투겁창 등과 같은 무기류 외에도 쇠도끼, 쇠낫, 쇠칼, 덩이쇠, 마구(馬具) 등이 확인된다. 쇠칼은 총 47기에만 부장되며 고리자루 부분이 세잎무늬인 1점을 제외하면 작은무늬고리자루큰칼이 주를 이룬다.
쇠칼이 복수로 부장된 예는 4기뿐이며 모두 주구묘이다. 이 중 3기는 5-2 지점 구릉 정상부에 자리하고 마구류와 덩이쇠 4매가 공반되지만, 한성기 중앙 양식의 토기는 부장되지 않아 백제 중앙의 영향을 받기 직전 수청동 지역의 최고 지배층 분묘로 볼 수 있다. 환두부에 교차점열무늬가 은상감된 환두도는 1점 확인되며, 금동제 화살통과 한성기 중앙 양식의 토기와 공반된다.
화살통은 총 3기만 확인되며 모두 4지점에 위치하고 마구와 한성기 중앙 양식의 토기가 공반하는 공통점이 관찰된다. 덩이쇠는 목관의 모서리에서 1점씩 세워진 채 부장되는 양상으로 총 5기의 분묘에서 확인되며, 모두 분묘군 내 대형분에 속한다.
마구류는 총 12기의 분묘에서 표비(鑣轡)를 중심으로 원형과 제형의 경판비도 부장되며 발걸이 없이 단독 부장되거나 1점으로 구성된 단등(單鐙)이 공반된다. 하지만 한성기 중앙 양식의 토기가 공반되는 유구에서는 안장 부속구 등 마구 일습(一襲)이 확인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수청동 마구에서만 관찰되는 특징은 수리 · 보수 흔적이 많이 확인되는 점으로, 이는 사용의 빈도가 높거나 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결과로 볼 수 있다.
청동기류는 구리창, 청동고리 이외에도 동탁(銅鐸) 내부에 작은 동탁을 넣어 부장한 형태가 확인되며, 민무늬의 깊은바리토기가 공반되어 분묘군 내에서 시기적으로 이른 편에 속하는 분묘에서 확인된다.
수청동 4지점 25호 널무덤에서 출토된 넓은입청자항아리는 전체적인 기형과 아가리의 특징 등이 중국 강소성 남경시 사가산(司家山) 6호묘(421년)와 구용시 원상촌(袁相村) 전실묘(439년)의 넓은입항아리와 유사하여 5세기 전반으로 편년된다.
이를 통해 왕성 주변에서 사치품으로 유입되던 중국제 자기가 이때부터 위세품으로 지방에 분배되었으며, 백제 중앙의 본격적인 관리 지역으로 경기 남부가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오산수청동유적은 경기 남부에 위치한 최대 규모의 분묘군으로 다른 지역이 구덩식 돌방 등 새로운 묘제를 도입하는 시점에도 목관과 목곽을 사용한 널무덤의 분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량의 유리제 구슬을 장송 의례에 사용하고 마구의 수리 · 보수 흔적이 다수 확인되는 등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지역성이 확인된다.
하지만 5세기부터는 한성기 중앙 양식의 토기와 위세품인 넓은입청자항아리의 유입으로 점차 백제 중앙의 지방 요충지로서 흡수되어 가는 과정이 관찰되기도 한다. 주변의 분묘 유적뿐만 아니라 주거지나 성곽 시설 등 생활유적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 황구지천과 오산천의 주변에 위치한 백제의 남부 지역 지방 세력 연구에 도움을 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