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영동군 계산리 일대에 분포하는 영동계산리유적은 경부고속철도 건설용지에 편입되어 1999년 4월 22일부터 같은 해 7월 30일까지 약 100일에 걸쳐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영동계산리유적은 얕은 구릉의 사면에 자리하고 있으며, 조사 당시 일대가 경작지로 활용되고 부분적으로 민가에 의해 점유되면서 일부 유물이 지표상에 노출된 상태였다. 발굴 조사 결과 신라 말~고려 초에 해당하는 건물터 및 기와가마터, 조선 전기에 해당하는 건물터 및 우물터가 확인되었다.
전자의 유적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청자 조각을 비롯한 자기류, 명문기와(글씨가 새겨진 기와), 연꽃무늬 수막새 등이 있다. 확인된 유구 가운데 신라 말~고려 초의 건물터 무리는 명문기와를 통해 982년을 전후한 시기에 조성되어 11세기 초엽까지 존속된 것으로, 이 시기 영동 지역의 유력 세력이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건물터 아래에서 드러난 기와가마터 2기는 위의 건물터 무리의 조성과 관련된 기와를 제작한 곳으로 추정되었다. 조선시대 건물터는 신라 말~고려 초 건물터 무리와 구릉으로 연결되는 비탈면에 자리하는데, 기와가마터 등이 폐기된 이후 그곳을 정지(整地)하여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같은 시대의 유구로 건물지 전면 북측의 우물 1기가 있는데, 내부에서 수습된 귀얄 기법의 분청 등 16세기 무렵의 자기들은 건물터와 우물의 사용 연대를 확인시켜 준다.
영동계산리유적은 시기적으로 신라 말에서 조선 전기에 걸치고 있으며, 다양한 기종의 토기류와 함께 해무리굽 청자완류(靑磁盌類), 철회청자(鐵繪靑磁), 기년명(紀年銘) 기와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태평흥국 칠년(太平興國 七年)’이 각인된 기와 조각을 통하여 10세기 후반~11세기에 건물터와 시설들이 활용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이 유적은 통일신라기 도장무늬토기의 하한 문제, 한반도 청자 발생과 관련하여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인 해무리굽 자기완의 시간적 위치 및 그 하한 문제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지견을 얻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영동계산리유적은 ‘태평흥국 칠년’의 명문기와를 통해 유적의 절대연대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건물의 건립 주체와 용도 등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또한 도장무늬토기의 하한 문제, 해무리굽 청자의 사용 연대 등에 대해서도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