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인산 소식이 알려지자 오수공립보통학교 교사 이광수(李光壽)가 서울에 가서 오세창(吳世昌) 등과 만나 만세 운동 진행에 관한 지시를 받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로 내려왔다.
1919년 3월 10일 10시경 오수공립보통학교(임실군 둔남면 오수리)[현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 400]의 학생들은 첫 시간 수업이 끝난 후 운동장에 모여 이광수 교사의 지도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뛰쳐나갔다. 놀란 일본인 교장이 다른 교사들과 함께 학생들과 학부형들에게 당부하여 만세 운동은 곧 잠잠해졌다. 어린 학생들에 의한 소규모의 만세 운동이었지만, 오수보통학교의 만세 운동은 임실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3·1운동이었다.
이후 오수 장날인 3월 23일 오수읍 장터(임실군 둔남면 오수리 소재)[현 오수면 오수리 325일대]에서 2차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 날의 만세 시위를 사전에 면밀히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은 지역 유지인 오병용(吳秉鎔) · 이기송(李起松) · 이만의(李萬儀)였다. 이들은 천도교인 및 개신교인들과 연락하여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 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여 최대 2000여 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시장 내의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고, 면사무소로 몰려가 면장과 면서기들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만세운동에 동참하도록 권유하였다. 이 날 저녁 남원헌병분견대와 임실경찰서에서 파견한 무장 병력이 출동하여 발포하자 만세 시위대는 일단 해산하였다가, 300~400명씩 무리를 지어 이튿날 새벽까지 계속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3일과 24일의 만세 운동으로 이기송, 오병용, 이만의가 체포되어 각각 징역 7년, 3년, 2년형을 선고받았다. 임실 둔남면 3·1운동은 임실군에서 처음 일어난 3·1운동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남원과 임실의 무장 병력이 출동, 발포까지 했다는 점에서 시위의 격렬성을 알 수 있다.